<중앙시평>'비인도적 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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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별일없이 이 여름을 지내는가 했더니 결국 메가톤급 태풍이 늦여름의 한반도를 강타했다.한총련 사태.5천8백48명 연행,4백61명 구속,3천3백41명 불구속입건,수백명의 학생과 전경 부상,1백50여억원의 재산손실이 뒤따랐다.A급 태풍 이 아니고 무엇인가.
분명 지나쳤다.당초의 평화스런 시위가 돌과 각목.화염병의 「전쟁」으로 발전했다.통일의 염원이 아무리 높다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더구나 방북(訪北)한 학생들의 행적은 북한당국에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것일뿐 진정 통일에 도움되는 것일 수 없었다.
한총련 학생들을 비판하는 목소리 일색이다.당연하다.그러나 듣고 있다 보면 그런 비판도 선을 넘고 있다.학생들을 「악(惡)의 자식」으로 규정하면서 『이번 기회에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주장은 학생들의 극렬한 주장만큼이나 섬뜩하다.이 런 비판적 분위기에 편승,경찰청장은 일반 집회 시위현장에서의 총기사용 가능성을 시사했다.오늘 한 의경의 억울한 죽음은 내일 학생들의 희생으로 연결될지도 모른다.여론의 불리를 인식하고 스스로 해산하겠다는 학생들이었는데 전원 검거 방침 을 세운뒤 건물을 폐쇄하고 포위한 것은 경찰이었다.건물과 기자재의 막대한 피해를 본 연세대가 경찰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이길 성싶다.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다.1,2천명도 아닌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이번 통일집회에 참석했다.왜 우리의 학생들에게조차 우리의 사회체제,우리의 통일방안을 납득시키고 지지받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때다.이런 초강경 대응 으로 한총련과 그 학생들의 생각을 고칠 수는 없다.이런 탄압은 더욱 외곬의 새로운 한총련을 만들어줄 뿐이다.지난 5,6공 시절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이 들고 나온 것은 통일이었다.통일에 관한 한 우리정부도 떳떳하지 못하다.『어떤 동맹국도 동족보다는 못하다』고 밝힌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취임연설은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그러나 몇년이 지나면서 쌓인 것은 상호불 신이요,맺힌 것은 한(恨)뿐이다.사사건건 남북한은 충돌했고 남북을 통하는 모든 문에는 빗장이 걸렸다.
북한이 허물어지고 있다.통일의 주도권은 우리에게로 넘어와 있다.시간은 우리 편이다.그러나 피의 희생이 없는 평화적 통일,민족의 질곡(桎梏)이 아니라 도약의 계기가 되는 상승적 통일은절로 오지 않는다.더구나 통일이 하루아침에 오기 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세상에 공짜는 없다.원인없는 결과도 없다. 57년 서독의 베를린 시장이 된 빌리 브란트는 『장벽이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진대 머리로 벽을 깨부수겠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선언했다.이미 육중하게 서버린 베를린 장벽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그러나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 겠다는 그의 소신은 바로 동방정책으로 꽃피었다.동독을 돕는 반역자라는 비난도 그에게 퍼부어졌다.그러나 그후 1백50억마르크의 교역량,3백70만명의 왕래가 매년 잇따랐다.바로 통일의 기반이었고 그 과정이었다.그렇게 도와준 것이 모두 독일연방공화국의 재산이됐다.한 나라가 돼버렸으니까.적게 주고 크게 먹는 전략이었다.
안보 측면에서 우리보다 심각한 대만은 더욱 교훈적이다.88년처음 교류가 시작된 대만과 중국 사이에는 95년 현재 7백60만명의 왕래,1억4백만통의 편지 왕래,1억6천만회의 전화통화,2만8천건 2백43억달러에 이르는 대만기업의 대 륙투자가 이뤄졌다.한쪽에는 포성이 오가면서도 이런 왕래와 거래는 계속됐다.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통일은 한치의 전진도 할 수 없다.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대학생마저 다스리지 못해 이 지경인데 항차 2천만 「빨갱이 원조」를 어쩌랴.이런 상황에서 통일은 머나먼 것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이산가족을 취재하러 온 독일 텔레비전방송국의 어느 기자가 현재의 남북한 관계는 「비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는 취재 소감을 밝히는 것을 들었다.통일을 이루지 못한채 21세기를맞을 수밖에 없는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가 바로 그 「비인도적범죄」의 공범이 아니고 무엇인가.
본란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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