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지구촌 음주문화 한국-맛.향기 구별 옛풍류 살아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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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나라 애주가들의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는 술의 생명인 「맛과 향」은 거의 개의치 않고 오로지 「취하기 위해」마신다는 점이다.1차,2차 자리를 옮겨가며 종류가 다른 술을 마신다거나,맛과 향기가 전혀 합쳐질 수 없는 이 술 저 술을 걸핏하면 섞어마시는 행위가 이를 반증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막걸리=농삿술,약주=풍류,청주=제삿술,소주=반주(飯酒)로 용도가 분명히 구분됐다.막걸리에 소주를 타서마셨다는 얘기는 어느 문헌에서도 아직 발견된 일이 없다.그렇다면▶끝장보기▶술잔돌리기▶섞어마시기▶접대부 앉히기 등으로 요약되는 요즘의 우리 음주문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술을 마시면 만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즉 「끝장보기」습관은 일제치하때 생겨났다는 얘기가 있다.태평양전쟁에 징발돼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비틀거리며 고성방가하는 모습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곧 사회 전반에 번졌다는 것 이다.그러나요즘의 우리 음주문화가 형성된 배경은 제3공화국의 경제성장모델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1차.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서슬퍼렇던 박정희(朴正熙)정권도 3S(술.섹스.스포츠) 에 대해서만은 아주 관대했다. 당시 수출역군인 저임금.과노동의 노동자들이 마시는 소주값은 절대로 못올리게 한 것은 물론 양곡관리법을 제정해 쌀을 원료로 한 비싼 술은 개발조차 못하도록 했다.이때 나온 술이 30여년이 지나도록 애주가들의 입맛을 하나로 통일시켜놓 은 지금의 희석식 소주다.
원료.제조방식.가격등 모든게 같다 보니 서울에선 진로소주,전남에선 보해소주를 선택의 여지없이 마셔야 했고,회사 상무든 갓입사한 신입사원이든 술자리에선 무조건 「소주」로 통일됐다.
한편 당시 朴대통령 자신부터 친지나 부하들과 술자리를 벌일 때면 사발에다 소주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킨후 동석자들에게 그 술잔을 돌렸다는 얘기는 유명하다.80년대초까지만 해도 신임장관이나 고위공직자 프로필에는 「두주불사(斗酒不辭 )형」이란 수식어가 으레 붙을 정도로 술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 대인의 풍모를 나타내는 척도로 인식돼왔다.이같은 강요형 술잔돌리기는 5공화국 초기 전두환(全斗煥)정권이 기업.언론등 사회 각분야에 걸쳐 통폐합작업을 벌이면서 맥주에 위스 키를 섞어(통폐합)마시는 소위 「폭탄주문화」를 탄생시켰다.점잖은 술자리엔 으레 접대부가 시중을 드는,외국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관행도 60~70년대 고도성장의 산물.행정규제가 심하다 보니 중소기업 입장에선 기술개발보다 대기업 임직원에 게 로비하는 편이 빠르고,대기업은대기업대로 정부관리를 접대해 이권을 따내는 쪽이 지름길이었다.
여기서 생긴 접대문화는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룸살롱이 많은 도시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처럼 왜곡된 음주문화가 최근 들어서는 많이 개선되고있다.특히 획기적인 변화는 양주는 물론 맥주.소주에 이르기까지최근 들어 고급화.차별화를 지향한 신제품들이 쏟아져나와 애주가들로 하여금 맛과 향을 스스로 고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술의 맛과 향기를 구별해가며 골라마시게 될 때 술은 무조건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마시는 「에틸알콜」이 아니라 생활에 즐거움을 하나 더 보태주는 「신(神)의 선물」이 될게 분명하다.
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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