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걷기 여행, 영화 촬영지를 찾아서-<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정읍 세트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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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하반기 가장 화제를 모은 한국 영화를 꼽자면 단연 ‘놈놈놈’, <좋은 놈 나쁜 이상한>이다. 제작비만 175억 원, 촬영기간도 무려 9개월이나 걸린 대작이었다. 한국판 서부극에 도전한 <놈놈놈>은 대부분의 장면을 중국에서 촬영했지만, 국내 촬영분도 약 30%는 된다. 전북 정읍 태인면 박산리에 마련된 <놈놈놈>의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것도 제법 괜찮은 가을 여행이 될 듯싶다.

‘세 놈’들의 흔적을 찾아가려면 고생은 좀 해야 한다. 촬영 장소가 상당히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태인면 박산리의 구렁이 논길을 제대로 찾아갔다면, 금세 촬영장에 닿을 수 있다. 논길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만 넘어가면 커다란 공터가 보인다. 근사한 관광지처럼 조성된 다른 영화세트장들을 떠올린다면 <놈놈놈> 촬영장은 애써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꽤나 불편하게 만드는 곳일 수도 있다.
약 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세트장은 국내 유명 미술감독인 조화성 씨의 손길을 거쳐 세워졌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탁월한 감각을 보여줬던 그가 다시 한 번 전북의 외딴 공터에서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다. 영화 속에서 세 명의 주인공들이 보물지도를 쥐고 광활한 대지를 누비게 되는데 그 전후 사정을 설명할 만한 공간이 주로 전북의 세트장에서 이루어진다. 세트장을 완성하기까지 약 반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했는데 이는 분과 초까지 쪼개서 쓸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영화판에서는 관행을 훌쩍 뛰어넘는 작업 시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만큼 작품의 내용과 미술적 완성도가 살아났다.

<놈놈놈>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부극에 해당하지만 역시 한국판이라 그런지 우리만의 개성이 있다. 강렬하고 고독한 느낌이 몽환적인 분위기와 한데 어우러져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복선을 깔고 있다. 공터를 중심으로 긴장과 혼란이 잔잔히 흐르는 구조물들이 가득하다. 목조 건축물들이 풍기는 허름하고도 불안한 기괴함, 너무 좁아서 차라리 미로 같은 골목들…. 이 모든 것들이 고리처럼 연결된 인연과 운명을 암시한다.
골목마다 자세히 뜯어보면 세세하게 변화를 준 부분들이 재미를 더한다. 시공간이 아득해지는 아편굴, 빛이 모두 차단되어 거의 밀실 같은 골목길, 허름하고 음산한 지붕들까지 심상치 않다. 세트장은 묘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자연 재료 이외의 것은 전혀 쓰지 않았다. 세트장 디자이너에 의하면, 이곳은 사람도 경계도 모두 굴절돼 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무엇 하나 제정신인 것이 없는 무질서의 세계. 그나마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주막이나 푸줏간 등에서 묻어나는 시대상이다. 하지만 ‘퓨전’이라는 단어는 사절이란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짬뽕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장장 반년에 걸쳐 세트를 짓고 촬영까지 모두 끝마친 전북의 ‘놈놈놈 세트장’, 그곳에는 지금도 기괴하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 신비스러움의 태반은, 모두가 아는대로, 모래에 빚지고 있다.

워크홀릭 담당기자 설은영 e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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