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宗孫의 괴로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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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35면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제사 지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른바 종손(宗孫)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노상추(1746~1829)는 종손 종옥(宗玉)과 끝내 불화했다. 종옥은 형님의 손자로서 집안의 종손이었다.

“이번 정월에 종옥이 아프다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몇 년 전 7, 8월 제사에도 전염병이 돌아 깨끗하지 않다며 제사를 안 지내려고 하기에 내가 임박해 서둘러 지낸 적이 있다. 또 지난겨울 묘사(墓祀)도 흉년을 핑계로 지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정월에 또 제사를 안 지내니 5대조 제사도 안 돌아보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제사에 소홀한 종손에 대한 비난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종옥은 또 제사답을 팔았다. 만세불역지전(萬世不易之田), 즉 대대로 절대 팔아서는 안 되는 제사답을 그만 팔아 버린 것이다. 노상추는 천하에 몹쓸 종손이라고 생각했다. 종옥은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종옥의 할아버지, 즉 노상추의 형님은 일찍 죽었다. 부인과 아들 하나를 남겨 두고. 형수는 당시 26세였다. 청상이나 다름없었다. 이 형수는 매사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친정 나들이[覲行]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니 어린 아들과 종부만 있는 종손 집은 썰렁할 수밖에 없었다.

노상추는 후에 이 종손 집이 늘 자기네 집을 헐뜯었다고 말한다. 『예기(禮記)』에서는 종손과 지손(支孫)을 하늘과 땅 차이로 구분했다. 지손은 종손보다 귀하고 부유해졌더라도 절대 부유한 티를 낼 수 없다. 가령 지손은 좋은 수레가 있어도 종손 집에 들어가려면 수레를 멀리 두고 단출하게 걸어 들어가야 했다. 종손의 권위를 한껏 높여준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종손의 권위가 그만큼 침해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잘된 지손들에 의해 말이다. 노상추의 집은 그야말로 잘됐다. 노상추가 무과에 급제해 고위직에 올랐고, 또 그 아들도 급제해 수령을 지냈다.

종옥이라고 왜 과거에 뜻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종손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제사 지내기다. 과거에 집중할 시간이 별로 없다. 노상추는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그 10년 공부에 가산이 탕진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집중력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제사의 주체인 종손들에게 과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선 후기 제사 지내기는 가문 유지의 기본이었다. 집안 사람들은 그 가문을 배경으로 관직에 나가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기본은 관직 생활만큼 화려하지 않다. 부러움을 사지도 않는다. 반면 종옥은 잘나가는 노상추 집이 부러웠을 것이다. 그러면서 종손 역할에는 싫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두 집은 갈등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종옥의 행동이 일면 이해되기도 한다. 화려함 없이 기본을 묵묵히 수행해야 하는 종손 역할은 때로 싫증이 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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