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中年>9.마을부녀회장 박준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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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서 가정을 지키면서 직업이라는 통로를 거치지 않고 사회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여성에게는 없을까.
서울북가좌2동의 터줏대감 박준자(朴俊子.58)씨.평생 직업을가져본 적도 없고 공직과는 더더욱 인연이 없었던 그의 생활을 들여다 보면 마음먹기에 따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이 든다.크게 부유하지도,어렵지도 않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인 박씨가 50대 이후 열정을 바치고 있는 일은 다름아닌 「이웃돕기」.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사실은 실천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 일을 통해 그는 30대 딸보다 훨씬 바쁘고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이 동네에서만 30여년을 살아오면서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이많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30대 후반에 마을 부녀회에 가입했고,5년전부터 부녀회장을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동네 부녀회장으로 그가 하는 일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 장 중히 여기는 것은 어려운 이웃들의 먹거리를 장만해 주는 것.시내에서가까운 곳이지만 다른 동네에 비해 소년소녀가장.무자녀노인들이 많은 편이라 1년에 몇차례씩 이들에게 김치를 담가주곤 한다.부모의 불화로 아이들끼리 지내는 결손가정 이나 돌보는 이 없이 홀로 사는 노인들이야말로 이웃의 손이 가장 먼저 닿아야 한다는생각에서다.
가끔씩 인근 노인정을 찾아가 음식을 대접하는 일,매년 대보름날이 되면 집앞 공터에 판을 벌이고 앞마당에서 부침개며 편육 등을 준비,온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일도 박씨가 최근 몇년간 지속해온 연례행사중 하나.크게 생색나는 일도 아니고주로 노동이 동반된 일이지만 그는 『남을 위한다는 생각보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한다』고 잘라 말한다.각박하기만한 서울살이속에서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베풀 수 있다는사실 자체가 말할 수 없는 큰 위 안이 된다는 것.
『무엇보다 내 몸을 바삐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이젠 한꺼번에 몇백명분의 음식도 부녀회원 몇명과 함께 척척 해내 주변사람들이 식당을 차려도 되겠다며 놀리곤 하지요.』 그런 박씨에게 요즘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최근 시에서 지급되던 부녀회기금이 부쩍 줄어든 것.「맨손으로 남을 돕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부녀회원들에게 회비까지 내라는 소리가 안나와 고민중이다.생각다 못해 남편 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다니며 신문지나 종이상자.책 등을 모아 팔아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임을 절감하고 있다.맏딸은 시집보내고 남편.노총각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부녀회장으로 일한 이후 몸 아플 새가 없었다며 『여편네가 쓸데없이 남 의 일에 왜 발벗고 나서냐』는 남편들의 몰이해가 우리 사회의 이웃돕기 운동 확산에 적지않은 장애가 되는 것 같다고 슬쩍 꼬집는다.
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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