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통일교] ③ 인터뷰1-문형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및 한국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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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 마이너리티 경험이 힘의 원천… 통일교 자긍심 회복이 가장 큰 과제

월간중앙

강력한 카리스마로 통일교를 창시해 오늘에 이르게 한 문선명 총재를 이어 교회를 책임지게 된 문형진 회장.

그러나 아직 이립(而立)의 나이에 앳된 미소년 이미지인 그는 “나는 아버지에게 고용된 사람에 불과하다. 언제든 일을 못하면 쫓겨날 수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아직 한국어에 서투르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가끔 어려운 단어가 튀어나올 때면 옆에 앉은 부인 이연아(30) 씨에게 물어봤다.

둘은 조혼을 권장하는 통일교의 전통에 따라 11년 전 결혼해 벌써 5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다음은 문형진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부친에 이어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서도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기까지는 많은 갈등이 있는데,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 태어난 만큼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을 것 같다.

“목회란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일종의 소명(召命)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바로 위 형인 영진 형이 죽은 뒤 인생에 대해 많이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영진 형이 관심을 가졌던 동양철학에 빠져 한동안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그 뒤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통일교의 뿌리인 서양종교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어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나의 경우는 목회를 하려고 종교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던 것이다.”

-목회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한 형제들에게 아쉬움은 없나?

“형제들 가운데 목회자의 길은 둘째누나인 인진 누나가 먼저 걸었다. 이미 10년 전 아버님으로부터 축사장에 임명되셨다. 그 동안 5자녀를 기르느라 목회활동을 하지 못하셨는데, 두 딸이 올해 하버드대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목회활동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1일자로 미국총회장에 오르셨다. 특히 인진누나는 목회활동으로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미국에서 태어난 형제들을 거의 기르다시피 하신 분이다. 내게는 어머니와 같은 누나다. 많이 의지된다.”

-그래도 남자 형제 중에서는 유일한데, 그 동안 아버지로부터 아들 중 한 명이 목회자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무언의 압력은 없었나?

“별로 느끼지 못했다. 아버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우리의 길을 찾기를 기다려주시는 편이다. 또 아버지는 우리가 어떤 길을 걷든,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그것이 목회활동이라고 말씀하신다. 생각의 유연성이 있는 분이다.”

-평범한 목회자가 아니라 문선명 총재의 아들로서 목회자라는 길을 걷고 있다. 이에 대한 부담은 없나?

“부담은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점점 커지고, 시간관리도 어려워지는 것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즐겁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았다. 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경호원에 둘러싸여 자란 것으로 아는데, 이런 환경에서 자란 것이 목회자로서 사목을 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모든 사람의 경험은 같을 수 없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에 따르면 심지어 샴쌍둥이마저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경험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돕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 나 역시 미국에서 자라면서 마이너리티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친구들은 백인이 아니라 흑인·히스패닉·이탈리아계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에서 이런 마이너리티 경험을 한 것이 지금 많은 도움이 된다.”

-10남매 중 막내다. 어려서 부모님으로부터는 물론 형제들로부터도 많은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을 것 같다. 형제들 사이의 관계는 어떤가?

“형제가 많다 보니 나이가 비슷한 형제들과 친하다. 국진 형과는 나이차가 적지 않지만, 국진 형이 영진 형과 친해 나와도 친해진 경우다. 영진 형이 죽었을 때 국진형과 내가 특히 힘들었다.”

-20대에 여러 종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 신부들과도 친하고, 불교에도 심취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들 종교에서 무엇을 배웠나? 그럼에도 통일교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예수회 소속 학교에 다니며 신부님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또 스님들도 가깝게 지내며 불교를 공부하며 천주교와 불교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한 번도 통일교를 떠나본 적은 없다. 통일교는 교명에서 말하듯, 모든 종교를 포용한다.”

-통일교가 현재 당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통일교 식구로서의 자부심 회복이다. 통일교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다. 아직도 군대에서 종교란에 통일교라고 쓰거나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종교가 통일교라고 밝히면 특별상담이 들어온다고 한다.(웃음) 통일교인임을 자랑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결국 우리 스스로 축복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축복된 삶을 살고, 우리의 축복된 삶을 이웃을 위해 나누어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내내 옆에 앉아 있던 부인 이연아 씨가 여기서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는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비즈니스에서 10년은 장기계획이 필요한 기간이지만, 종교에서는 한 세대도 짧은 기간이거든요. 오늘의 기독교도 2,000년에 걸쳐 이뤄진 것이잖아요? 많은 신흥종교가 지탄을 받는 것도 너무 조급하게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조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다 자기 발등을 찍는 것이죠. 우리는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갈 생각입니다.”

글■오효림 월간중앙 기자 hy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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