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주부가 있어야할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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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던 옆집 새댁은 남편이 직장을 마산으로 옮기게 돼 가게를 내놓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새댁이 해보라며 부추기는 통에 앞뒤 잴 겨를도 없이 처음으로장사라는 걸 해보게 되었다.남편은 초등학교 4학년과 3학년인 아이들이나 잘 키우라며 반대했지만 내집이라 월세도 안나가고 살림집이 3층이니 아이들 뒷바라지도 잘할 수 있다 고 우겼다.
욕심부리지 않고 아이들 중학교 입학전까지만 슬슬 해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꿈이었는지 한달이 못가서 점차 터득할 수 있었다.
얼마 안가서 집안꼴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방안 구석구석 여기저기 벗어놓은 양말이며 속옷이 뒹굴고 선반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였으며 아이들 도시락 반찬은 점차 인스턴트식품이 주류를이루기 시작했다.
오전10시부터 자정까지 꼬박 14시간을 가게에 붙어있어야 했기에 아이들끼리 라면도 끓여먹고 볶음밥도 곧잘 해먹었다.나는 나대로 손님이 뜸한 틈을 이용해 3층으로 오르락 내리락 다람쥐경주를 하면서 숨가쁘게 살게된 것이다.
남편이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아이들은 영락없이 라면이나 자장면신세를 면치못했다.아이들이 숙제를 하다 책상에 엎드려 그냥 자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 켜놓고 잠들 때도 더러 있었다.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내겐 큰 고통이었다.이런 저런 우여곡절끝에 옆 매장까지 확장하고 좋은 비디오 다 갖추어 좋은 비디오숍 경영자 모임인 으뜸과 버금 간판까지 새로 달고 안양의 문화공간이란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가게를 가꾸었다.
그러나 일이 바빠지는 것과 비례해 집안꼴은 말이 아니었다.
결국 고통을 이겨내고 이룩한 나의 부업터전을 문닫기로 용단을내렸다.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아들이 올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친구들은 이제 땅짚고 헤엄치기식으로 돈을 벌 것이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중요한 시기를 돈벌이에 놓쳐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돈과 일보다 아이들과 남편이 내게 더 소중한사람들이 아닌가.아쉽고 서운함이 온몸을 감쌌지만 결국 본업인 주부로 돌아왔다.
이제 당당한 주부가 돼 늘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을벗어던지고 우리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가능성을 한껏 펴보일 수 있도록 애정으로 보듬으려 한다.「4년간의 어지러웠던 외유」는 그런대로 좋은 추억이 되리라.
이정재 경기도안양시안양5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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