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사가 쓰는 性칼럼]여성들이여, 섹스는 의무 아닌 권리랍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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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16면

10년은 젊어 보이는 40대 여성 P씨가 진료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어…, 제가 원래 이런 데 올 사람은 아닌데요. 친구들이 저더러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고 해서요.”
P씨는 엄격한 집안에서 소위 양갓집 규수로 자랐다. 예쁘장한 외모에 애교도 있어 뭇 남성에게 인기도 많았지만 엄한 부모 탓에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 봤다. 결혼도 부모가 정해 준 조건 좋은 남성과 했는데, 능력 있고 믿음 직한 남편이지만 짜릿한 연애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편과의 성생활은 별 느낌이 없었다. 좋다는 느낌은커녕 때론 심하게 아프기도 해서 이런 걸 왜 하나 했다는 것이다. 좋은 느낌이 없으니 당연히 성욕도 생기지 않고 남편의 요구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도망 다니기 바빴다. 그렇다고 너무 피하면 혹시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울까 겁나서 마지못해 ‘의무방어전’은 치렀다. 40대에 들어서야 친구들과 성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남들이 다 경험해 본 그 오르가슴이란 걸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제게 뭔가 결함이 있나 하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남편이 나를 피하나 의심도 들고…. 좋지도 않은데 의무감에 응하고 나면 자괴감 때문에 우울해요.”P씨처럼 이전에는 가슴에 묻어 두고 스스로 외면하던 성문제를 해결하고자 진료실의 문을 두드리는 여성이 최근 부쩍 늘었다.

일러스트=강일구

P씨의 경우 오르가슴 장애에 2차적으로 성욕 저하증까지 와 있는 상태다. 두 문제 모두 여성이 흔히 겪는 대표적인 성기능 장애다. P씨는 소극적이어서 더욱 성반응이 미약하고 파트너와의 성적 불일치, 그리고 성에 대한 심리적인 억압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사실 P씨도 성에 대한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왠지 부도덕하고 천박한 것 같아 의도적으로 성에 대한 관심을 억제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혹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너무 밝히는 여자 같아 보이나요?”
P씨는 진료 중에도 수차례 이런 질문을 던졌다. P씨의 이런 불안은 여성 윤리에 대해 억압적인 우리 사회 탓이다. 여성이 성적으로 능동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남성의 성적인 요구를 잘 맞춰야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이중적인 잣대가 큰 문제다.

남성의 이상형 여성상에도 이런 이중 잣대는 드러난다. 청순하고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여성이 큰 인기를 누린다. 사실 이런 이중 잣대의 저변에는 남성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지나치게 섹시한 여성은 자신을 압도해 버릴까 봐 겁이 덜컥 나는 것이다. P씨와 같은 성적 억제는 환자가 겪어 온 긴 고통의 시간에 비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치료될 수 있다. 치료를 끝내면서 P씨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돌이켜 보니 내가 누려야 할 즐거운 권리를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싶어요.”
P씨의 말대로 섹스는 의무가 아니라 여성이 누려야 할 권리다. 특히 성에 소극적인 여성은 더 이상 권리를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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