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한국판 디아스포라, 그 성공의 심리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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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16면

몇 년 만에 해외여행객이 줄고 있다고 한다. 견문을 넓히고 재충전하는 해외여행의 장점도 많지만 물불 가리지 않는 과소비와 원정 매매 등의 행태는 참으로 추하다. 남 따라 하는 ‘묻지마 유학’을 보낸 아이들과 그 가족의 후유증도 이젠 상담실에서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 나가 봐야 별것 없더라는 단순한 깨달음을 얻느라 감당하지 못할 출혈을 경험해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실 작은 나라에서 조밀조밀 부대끼며 사는 한국인이 일단 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매우 자연스럽다. 먹이는 한정되어 있는데 서로 남의 것 뜯어먹으려고 싸우느니, 차라리 더 넓은 세상에 가서 네 활개를 펴고 기운차게 살아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시베리아·아프리카 등, 따지고 보면 부지런한 한국인이 자리 잡고 돈 벌 수 있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미국·일본·남미에서 허드렛일 마다하지 않고 장시간 온 가족이 매달려 일해 큰 부자가 된 교민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체면 유지나 인맥 관리, 그 밖의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 에너지들을 오로지 일에만 쏟아 부으니 머리 좋고 능력 있는 한국인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국인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또 다른 한국인 공동체를 만드는 현상을 유대인의 이산(離散), 즉 디아스포라(diaspora)에 비유하기도 한다. 전 세계에서 유대인과 중국인 상인들과 대적해 이길 수 있는 인종은 한국인밖에 없다는 말도 있다. 높은 교육열과 직업윤리 의식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헝그리 정신과 성공 신화들이 서서히 줄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코리아타운은 중국인이나 베트남 상인이 잠식해 가고 있고, 아프리카에선 요소요소를 선점한 중국인 때문에 후발주자인 한국인이 발을 못 디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성매매와 사기를 일삼는 어글리 코리안의 이미지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고 한다. 돈만 낭비하는 일부 유학생이나 기러기 가족 역시 좋지 않은 인상을 심고 있다.

남의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 텃세에다 향수병과 문화 충격 때문에 일종의 적응장애를 겪어야 한다. 마치 다시 태어난 어린아이인 양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굴욕과 역경의 과정을 잘 견뎌 내면 고향에서와는 전혀 다른 강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집과 고향을 떠나 고생하지 않고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겠는가. 물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문 자기 삶이 힘들고 불만스럽기 때문이지만, 막상 그곳으로 가면 예기치 않던 지뢰와 복병이 숨어 있는 게 인생이다.

스스로는 변하지 않은 채 환경만 변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무조건 짐만 싼다면 결국 어딜 가도 정착하지 못하는 저주에서 영원히 풀려날 수 없다. ‘떠남’의 목적이 충전이든, 교육이든, 돈벌이든 과거의 나로부터 이별해 새로운 나를 만나지 않는 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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