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와인을 품은 조약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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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14면

하얀 레이블에 새겨진 조약돌은 완전한 구형이 아니다. 겉 표면 또한 탐스러운 매끄러움은 없고, 오히려 군데군데 파인 홈과 긁힌 자국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 레이블의 주인공은 수백 년 전부터 스페인 라 리오하(La Rioja) 지역에서 명품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마르티네스 부한다(Martinez Bujanda) 가문의 역작 ‘핀카 발피에드라(Finca Valpiedra·돌의 계곡에 있는 포도밭)’ 레제르바(Reserva) 와인이다. 레제르바는 통이나 병에 넣고 일반 숙성 기간보다 좀 더 오래 숙성시켜 생산한 와인을 말한다.

와인 레이블 이야기 <9>

와이너리와 와인의 이름이 같은 핀카 발피에드라는 엘부로 강을 낀 라 리오하 지역의 아름다운 계곡, 조약돌과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80㏊의 최고 싱글 빈야드에서 생산된다. 1886년부터 와인을 생산해 온 마르티네스 부한다 가문은 다른 모든 농부의 염원처럼 자신들만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를 원했다.

이런 가족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현재 오너의 할아버지가 1970년대에 이 포도밭을 마련했다고 한다. 한 농부 가족의 오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포도밭이 바로 핀카 발피에드라다. 가족은 정성을 다해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20년의 세월을 보냈고 마침내 94년에 첫 번째 핀카 발피에드라 리제르바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빈티지(94, 95, 96년)들은 현재의 레이블과 달랐다. 와인 자체도 만족스럽지 않아 출시도 미뤄졌다. 꿈을 이루게 해준 의미 있는 와인이었던 만큼 가족은 많이 고민했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기다리며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가족은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조약돌 하나를 찾아냈다. 처음에는 모나고 거칠었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며 부딪치고 갈려 둥글고 따뜻한 표면을 갖게 된 조약돌은 가족의 꿈이 성장해 온 모습과 많이 닮았다.

사실 와인에 있어 돌멩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선 돌이 많은 포도밭에는 항상 따뜻한 기운이 감돌아 포도가 완숙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람이 많은 지역에서는 돌이 포도나무를 감싸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배수 현상을 도와 갈증을 일으키는 포도나무 뿌리가 물을 찾아 지하 깊은 곳까지 다다르게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달콤한 포도와 거친 돌멩이가 어울린 핀카 발피에드라 레이블은 보다 강렬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처음 포도밭을 구입하고 30년이 지난 핀카 발피에드라는 이제 라 리오하 지역에서 새로운 와인 역사를 쓰는 와이너리로 인정받고 있다. 토종 포도인 템프라니오 품종을 90% 사용하고 5% 정도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와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열린다. 마치 레이블에 그려진 돌멩이가 비바람에 조금씩 마모되면서 표면에 미세한 그림이 새겨지듯.

이 때문에 이 와인은 코르크를 열어 놓고 반 시간 정도 기다려 주면 좋다. 그러면 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돌의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핀카 발피에드라 포도밭 토양에는 풍부한 칼슘과 구리·철 등의 미량의 영양소가 함유돼 있어 독특한 맛을 준다. 깊고 짙은 색 속에 집약된 붉은 과일 향도 와인의 감미로움을 더해 준다.

필자는 얼마 전 이 와인을 담석으로 며칠 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돌아온 직원을 위해 오픈했다. 돌의 이미지는 좀 달랐지만 레이블 속 조약돌처럼 직원의 아픔이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의 몸에서 흘러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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