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북한의 진지한 반응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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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공은 이제 북으로 넘어갔다.15일 제주의 한.미(韓.美)정상회담에서 제안한 4자회담구상은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지만 북한의 평화의지에 대한 물음을 담은공이기도 하다.우리는 손성필(孫成弼)주러시아대사 가 16일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4자회담제의 거부를 북한당국의 공식 대응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다.孫대사의 발언을 북한의 첫 반응쯤으로생각하는 우리는 북한이 우리의 제안을 상투적인 남북대결 차원에서 보지 말고 시간을 갖고 진지하게 검토할 것을 거듭 기대한다. 북한에 이러한 기대를 하는 것은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클린턴 미국대통령이 제주에서 단독 대북(對北)평화협상을 벌이지 않겠다고 직접 공표한 의도를 파악해 이제 북한도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때가 됐다.
그런 뜻에서 남북한과 미국및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제안은 북한으로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 우리의생각이다.우선 이 4자가 모두 한국전쟁의 직접 당사자라는 점을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또 우회적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희망하는대로 미국과의 대등한 맞대면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이점 등을 북한이 외면하지 않기 바란다.
이번 제안에서 주목할 점은 아무런 전제조건을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북한이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4자회담에 나와 제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4자회담의 필요성은 남북한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체제의 협상당사자 문제는 어느 한쪽의 굴복이 없는한 교착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교착상태는 이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고 있다.교착상태를 가 능하게 해주던 냉전시대 논리의 발붙일 여지가 극히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북.미(北.美)접촉이 잦아지고,양자간 관계개선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체제문제는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아무리 평화체제문제와 미국의 북한접촉을 분리시키는 원칙을 세웠다 해도 두가지 문제는 병행해서 풀어가는 수밖에 없도록 돼 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남북한 당사자에 의한 평화체제구축이라는 기본입장의 고수가 가능한 것인지,또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선택해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됐다.더욱이 북한의 정전체제 무력화(無力化)기도에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지나치게 수세적(守勢的)이라는 일부의 비판도 있던 참이다.심한 경우 우리의 주장이 시대에 뒤진 낡은 논리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제안은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획기적이라고 할만 하다.적극적이고도 주도적으로 한반도문제를 풀어나갈 수있는 방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나라 대통령이 제안한 4자회담은 공동발표문에서 밝혔듯이 「항구적 평화회담을 이룩하는 과정을 개시하기 위한 것」이다.4자회담이라는 방안 자체가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그렇기 때문에 남북한과 미(美).중(中) 4당사자가 직접 만나 우선 평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한 의지가 없이 어느 누구와 평화체제 교섭을 벌인다고 해서 평화가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더욱이 현재와 같이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구조를 그대로 둔채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만사가 해결되지는 않는다.온갖 평화와 화해의 장치를 화려하게 약속한 남북한간의 기본합의서가 사문화(死文化)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증거다.
따라서 평화체제구축의 진정한 기준은 우선 정치.군사적 신뢰의바탕을 마련하는데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남북한 기본합의서의 실패는 두 당사자만으로는 그러한 신뢰의 바탕이 취약함을 보여준예이기도 하다.4자회담은 미국과 중국이 제3자 입장에서 그런 약점을 보완해준다는 측면도 있다.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해 이제 북한이 선택할 차례다.중국을 포함해 주변의 많은 나라들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이 제안에 호응하기를 간곡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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