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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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아리영과 이자벨은 애소를 데리고 내일 모레 일본으로 간다.그곳에서 시동생을 만나고나서 애소는 앞일을 정하겠다 했다.
아이를 이자벨 내외 앞으로 입양시킬 경우 한돌이 될 때까지는자기가 키우겠고,그 후엔 따로 살되 1년에 한번씩은 아이를 만나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이자벨의 약속을 받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당찬 아이가 어째서 뜨내기나 진배없는 남자에게 간단히 몸을 허락하고 말았는지 답답했다.남녀간의 얽힘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간 관계가 아닌가.
긴 하루였다.
또다시 여행 준비를 하며 애소의 몫까지 챙겼다.박물관과 도서관.서점등을 누비며 통역자와 함께 이자벨이 구해온 단원 관계 책자를 살펴 목차 설명도 해주었다.
이자벨은 며칠 사이에 확신을 얻은 듯했다.똑같은 18세기 후반의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와 도슈사이샤라쿠(東洲齋寫樂)가 동일인물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것은 연구에 앞서 진짜와 가짜를 우선 감별해야 하는 미술평론가의 기본적인 센스와 알음알이에서 얻어지는 「믿음」이라고나 할까. 상황 증거는 충분하다.문제는 샤라쿠가 일본 에도(江戶)에 혜성처럼 나타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1794년 5월서부터안개처럼 사라진 1795년 정월까지의 열달 사이에 단원이 일본에 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다.그에 관한 문 헌이나 방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단원과 샤라쿠의 그림새가 일치함을 입증해야 한다.이자벨은 신명나는 수수께끼 풀이와도 같고힘겨운 자갈밭갈이와도 같은 작업에 뛰어든 셈이다.
「일」을 가지고 있는 이자벨이 부러웠다.벅찬 고난을 수태한 애소에게도 미래는 열려 있다.자기 일을 가진 여자가 될 수 있는 리드미컬한 미래다.
시동생은 보나마나 애소를 거부할 것이고,그렇게 되면 애소는 일본에 머무르며 아이를 낳아야 하고,자신의 계획대로 한 1년 키우고 난 후엔 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애소와 함께 일본에 주저앉아 이자벨을 도우며 공부할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한국인에게 있어 일본열도는 고대로부터 줄곧 비약을 위한 디딤터요,난리를 피하기 위한 피난처이기도 했었다.
신라의 선화공주를 꾀어 아내로 삼은 서동(薯童),즉 백제의 무왕(武王)은 소위 제34대 왜왕 서명(舒明)과 동일인으로 보아져있다.이들이 죽은 것은 641년.죽은 해까지 똑같다.한.일두 나라의 이 두 왕 역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무왕과 서명왕,단원과 샤라쿠를 생각하며 우변호사로부터 통고받은 여섯시 고비를 어렵사리 넘겼다.아리영의 긴 하루가 얼얼한 노을과 함께 마감되어가고 있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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