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정치의 덫에 걸린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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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현희(金賢姬)일당에 의해 대한항공 858기가 미얀마 영해 상공에서 폭파돼 승객과 승무원 1백15명이 희생된 것은 87년11월29일.그리고 김현희가 바레인에서 서울로 압송된 것은 12월15일로 대통령선거 투표일 사흘전이었다.이 사건은 북한의 위협이 현실문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웅변으로 말해주면서 유권자들의 심리를 변화보다 안정쪽으로 돌리는데 적지 않은 작용을 했을것이다. 선거에서 여당의 노태우(盧泰愚)후보는 36.6%를 득표해 김영삼(金泳三.28%),김대중(金大中.27%)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김현희가 盧후보의 당선에 어느정도 기여했는지 수적으로 계산하기는 어렵다.
그때 정부는 김현희가 붙들려 있는 바레인에 특사를 보내 신병인수문제를 협의했는데 정부의 「숨은 의도」에 대한 억측은 두갈래였다.김현희를 서울로 압송하되 너무 일찍 데리고 와 투표일 전에 약효가 떨어져서도 안되고,너무 늦게 데리고 와 선거에 써먹을 수 없어도 안된다는 것이었다.결과적으로 김현희는 가장 적당한 시점에 서울에 그 모습을 나타내 북한에 대한 경각심과 안보의식을 최고로 일깨우는데 기여했다.
국내정치가 끝나는데서 외교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키신저의 지적대로 그것은 국내정치가 안정돼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국내정치가 유동적이거나 열띤 선거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대외정책은 곧잘 정치의 덫에 걸리게 된다.재선에 나선 현 직 대통령이나 여당이 「여당 프리미엄」을 누리려 하는 것은지극히 당연하다.다만 그런 정략이 외교의 발목을 잡아 국익을 해치는 경우는 문제가 심각하다.
4월 총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성혜림(成蕙琳)의 한국망명 불발 사건이 터진 것도 정부여당의 선거전략과 관련해 다시 한번생각해 볼 문제다.성혜림이 서울에 왔다면 북한체제에 대한 한국의 절대적 우위가 다시금 웅변으로 증명됐을 것이 다.그녀가 「폭로」했을 김정일(金正日)의 행태는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다시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성혜림의 한국행이 실현되지 않은 것이 여당에는 아쉬운 일일는지 몰라도 정치를 초월한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김정일의 흘러간 애인이 와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북한이 부릴 히스테리에 비하면 그녀가 제공할 가 십적인 정보는 그다지 쓸모없을 것이다.
대북(對北)관계와 함께 자주 정치의 덫에 걸리는 것이 한.일(韓日)관계다.
4월총선을 앞두고 독도분규가 재연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선거때문에 정부의 대응이 무리하기 쉽다.이번에도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다시 열기로 하는 갈팡질팡이 연출됐다.일본의 턱없는 생떼로야기된 독도문제는 정치를 초월한 분명한 자세로 처리해야 한다.
지금의 동북아시아 정세를 생각하면 한국이 남북관계를 더욱 긴장시킬 일을 하거나 한.일분규의 해결을 정치 때문에 늦출 형편이 아니다.남북관계,한.일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대만관계,오키나와문제를 둘러싼 미.일(美日)관계가 한결 같이 동북아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지역 각국의 국내사정도 마찬가지다.북한 김정일체제와 덩샤오핑(鄧小平)이후 중국의 내일이 불투명하고 일본의 국내사정도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국내정치가 불안할 때 외교적인 마찰은 증폭되게 마련이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은 아직도 포스트냉전의 질서가 정착되지 않고있다.작은 충격에도 견디기 힘든 질서가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미국 중앙정보국장의 말대로 북한체제가 붕괴돼가고 있는 것이라면 한국은 미국.일본.중국과의 공조(共助) 를 최대한으로유지해야 한다.특히 지금은 한국이 한.일관계의 긴장을 오래 끌때가 아니다.성혜림의 서울망명을 그쯤에서 단념한 것처럼 대외관계는 정치에서 최대한 자유로워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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