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엄마는 '오케이' '생큐'밖에 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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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토요일의 점심준비로 한창 바쁜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딸 아이도 쪼르르 뛰어 와 옆에 앉았다.수화기를 드는데 「안뇽하세요우? 미스터 유 있써요? 나는 미스터 아루죠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가 남편을 찾는다.남편은 지금 퇴근 길에있는데,뭐라 말해야 하나….
안타깝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반백의 외국인을 나는 기억한다.1년쯤 전이었을까.남편과 함께 백화점 앞에서 마주쳐 인사했었다.미국에서 온 회사 손님인데 남편이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했다. 남편의 도움에 감사한다며 그는 나에게까지 고마워했다.그때도 나는 아주 단정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하고 고개숙였을 뿐이다.그리고 그가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웬 전화인가.어쨌든 그는 지금 미스터 유를 찾고 있는데 동전 떨어지 는 소리는 바쁘고 나는 대답할 말이 너무나 궁색하다.
겨우 「노」인가 「낫 히어」라고 대답했던 것같다.그리고 온통문법이 엉망인 문장으로 「내가 당신을 기억한다」고 더듬거렸을 때 그는 거의 감격했다.그리고는 지금 전화하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야 했는데 「웨어 유(Where you?)」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내일 다시 전화하겠다고 그는 두번씩이나 천천히 말했다.분명히알아들었다고,남편에게 전해주겠노라고 말해야 했지만 겨우 「오케이,오케이」하고는 수화기를 놓았다.
여러모로 창피한 고백이지만 10년전 졸업한 대학에서 나는 영어와 많이 닮은 외국문학을 전공한 꽤 똘똘한 아가씨였다.
퇴근해 집으로 들어서는 미스터 유에게 전화 내용을 흥분해 설명하는데 까만 눈을 반짝이는 딸아이는 「엄마는 오케이하고 생큐밖에 몰라」하고 물었다.
딸이여,자라면서 부디 잊어다오.오늘의 이 통화를….
윤은현 경북구미시도량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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