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69>‘과일이 익기 까지’ 기다린 박찬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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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24면

“마이너로 갑니다. 그래도 마음이 가벼운 건 왜죠. 과일이 익으려면 시간이 필요하죠. 그리고 잘 익은 과일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죠. 그런 시간이 제게 필요합니다.”

메이저리그 시즌이 시작되던 3월 31일 새벽이었다. 전화기가 부르르 떨렸다. 박찬호(LA 다저스)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에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가 메이저리그에 남지 못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좌절의 아쉬움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발전을 통해 빅리그로 다시 오겠다는 도전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처음엔 “이른바 ‘긍정의 힘’ 인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의 그 잔잔한 희망이 현실로 이어진 요즘, 그의 재기를 통해 뚜렷한 시사점 하나를 본다.

그가 선발로 호투하는 비결에 대해 주위에서 묻는다. 박찬호는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느냐고. 어떻게 10년 전에 던지던 꿈틀거리는 그 빠른 공을 다시 던질 수 있게 됐느냐고. 그의 대답을 통해 정리해 보면 이렇다. 그는 그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구 폼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 투구 폼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몸을 준비했다. 크게 보면 이 두 가지다. 그리고 그 단순해 보이는 두 가지를 얻기 위해 그는 위에서 말한 ‘과일이 익는 시간’을 기다렸다. 지금의 박찬호는 그런 과정을 통해 10년 전에 던졌던 그 공을 다시 던질 수 있게 됐고, 10년 전의 그 마운드에 서 있다.

박찬호의 투구 폼은 그가 옮겨 다닌 팀만큼이나 자주 변했다. 그가 다저스를 떠나 텍사스로 갔을 때 그는 플라이볼을 유도하는 투수가 아니라 땅볼을 유도하는 투수가 되어야 했다. 공 끝이 떠오르는 포심패스트볼(공이 한 번 회전할 때 실밥이 네 번 공기와 교차하는 구질)이 아니라 공 끝이 가라 앉는 투심패스트볼을 자신의 주무기로 만들었다. 그 사이 다이내믹했던 그의 투구 폼은 얌전하고 딱딱하게 변했다. 크고 작은 부상도 그를 괴롭혔다. 그 부상은 다저스 시절의 투구 폼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게 했다.

텍사스를 떠나 내셔널리그의 샌디에이고로 오면서, 그리고 뉴욕 메츠와 휴스턴의 마이너리그를 거치면서 그는 자신의 주무기 포심패스트볼을 다시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시절의 몸을 갖지 않고 다시 그 투구 폼을 시도한다는 것은 헛수고였다. 그 두 가지는 병행돼야 했다. 그는 다저스 시절의 투구 폼이 담긴 비디오를 보고 또 봤다. 어떤 자세에서 자신이 가장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자세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위해서는 어떤 몸의 근육이 필요한지를,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의 동작에서 어떤 게 필요 없는지를 조목조목 따졌다. 그러고 나서는 그 내용들이 몸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때 필요한 게 ‘과일이 익는 시간’이었고, 그는 마이너리그로 가야 했다.

그는 지금 잘 익은 과일 맛이다. 10년 전에 던졌던 시속 155㎞의 빠른 공을 다시 던진다. 그리고 마운드에서의 안정감은 지금이 더 낫다. 그 시절보다 훨씬 많아진 경험 덕분이다. 앞으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시즌만이 그에게 남았기에 요즘의 그의 투구는 더 아껴서 음미하며 즐길 만한 것 같다. 그 과일을 잘 익게 만들어 준 시간의 힘. “신이 세상을 만드는 데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그 진리를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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