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法보다 무서운 逕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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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야당은 연일 청와대가 여당의 선거본부처럼 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이런 비난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가령 야당은 YS의이회창(李會昌)씨 주례(週例)면담에 시비를 걸었지만 중앙선관위는 이를 위법이 아니라고 판정했다.YS는 선거에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선거운동을 지휘할 여당총재이기도 한만큼 선관위의 결정은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한사람이 극과 극으로 상반되는 두가지 역할을 하는데 있다.한쪽으로는 엄정중립을 지켜야 하고,다른 한쪽으로는 선거승리의 중심역할을 해야 하니 그 역할의 구분과 경계선 긋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닌 것이다.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비 교적 엄격히구분되고 있다.얼마전 힐러리여사가 자기 책 선전행사에 참석하기위해 전용기를 이용했다 하여 구설수에 올랐지만 왕복여비는 출판사가 국고에 납부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우리의 경우 이런 공(公).사(私)의 명확한 구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관행이 아직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관용차나 회사차를 개인 볼일에 쓰면 안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그러나 아는 것과 실제 차를 타는 것과는 차이가 많은게 현 실이다.
며칠전 야당대변인은 손명순(孫命順)여사가 청와대에서 신한국당공천자부인들을 초대해 오찬을 함께 한 것을 두고 「청와대의 이상한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비꼬았다.물론 이날 오찬은 孫여사가 대통령부인 신분이 아닌 신한국당총재부인의 신분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게 없다.다만 청와대가 우리사회의 보다 엄격한 공.사 구분을 장려하고 모범을 보인다는 뜻에서라도 오찬비용은 정부예산이 아니라 개인 또는 신한국당 부담이었다는 사실을 슬쩍 흘렸더라면 좋았을 것이 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선거정국을 보면 아쉬운 일이 많다.가령여야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장관들의 잇따른 지방나들이도 그렇다. 그것이 적법(適法)이냐,위법이냐는 둘째 치고 그것이 여야간에 공평하냐,경위(涇渭)에 맞느냐 하는 점이다.다 알다시피 우리 국민은 유달리 공평하지 못한 일을 못참아 하고 「경위」를 따지는 편이다.사전에 따르면 「경위」라는 말은 「사 리의 옳고그름이나 이러함과 저러함의 분간」이란 뜻이다.
「경우(경위)가 맞다,안맞다」는 판단 또는 느낌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1차적인 판정기준이 된다.장관들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지역별로 듣기 좋은 정책을 발표하면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건 뻔하다.그렇지만 그것이 적법이라 하더라도 게임에 개입해선 안될사람들이 개입해 여당을 유리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국민이 보기에공정하지 못하고 경위에 안맞는 것이 되기 쉽다.
요즘 각 부처에서는 여관.음식점에도 은행대출의 길을 열어준다든가,공무원 정년(停年)의 연장을 검토한다는 등의 듣기 좋은 정책도 자주 내놓고 있다.정부가 선거철에 평소보다 국민을 더 끔찍히 위해주는 것은 좋지만 이 역시 공평하지 못 하다,경위에안맞다는 국민정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장관들의 지방나들이나 선심정책은 여당이 앞장서서 막아야할 것이다.국민 마음에 공평하지 못하다거나 경위에 어긋난다는 그림자가 한번 드리우면 여당엔 결과적으로 엄청난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정책이 비록 입에 달고 구체적 혜택이기대되더라도 「선거용」이란 의심이 들면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가 쉽다.그리고 설사 진짜 좋은 정책이라도 동기의 진실성이의심받으면 효과적 추진도 어려워진다.
원래 선거철의 선심정책이나 장관나들이는 역대 권위주의 정권들의 오랜 단골메뉴였다.선거를 못느끼다가도 선심정책이 나오는 걸보고 아,선거철이 왔구나 하고 깨닫곤 했었다.국민은 이런 속보이는 처사에 신물난지도 오래고,문민정부가 들어서 면 이런 일은저절로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왔다.
문민정부는 이런 믿음에 어긋나서는 안될 것이다.장관이나 한국은행총재가 지방에서 수행해야 할 「통상업무」가 급하더라도 경위에 안맞다는 국민정서를 일으킨다면 위험한 일이다.
시저는 자기부인의 부정(不貞)소문을 결코 믿지 않는다고 단호히 일축하고도 이혼을 했다.소문을 안 믿으면서 왜 이혼했느냐는물음에 그는 『시저에 관해서는 소문도 결백해야 하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도 시저를 닮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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