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08. 세상을 더 넓게 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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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의 갱년기 우울증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는 50번째 생일이었다. 1988년 2월 28일, 생일 아침이 되었는데 갑자기 쉰 살이 되어버렸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 나는 더 이상 젊지도 싱그럽지도 않은 나이가 됐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한없이 슬펐다.

당시 나는 외모로는 마흔 살 정도로 보였다. 외국에서는 30대 중반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몸의 어느 한 구석도 아프지 않았고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내 마음은 이미 갱년기 증후군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 자체가 서글프고 허무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없이 우울하고 무기력해져서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는 가족·지인들과의 저녁식사 약속까지 모두 취소하고, 온 종일 혼자 집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나와 비슷한 연령의 우리나라 여성들과 비교해볼 때 나는 비교적 선택 받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일본·동남아시아·미국 무대에 진출해 가수로 활동했고, 팬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 속에 원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국가적인 행사에 초청받아 노래 부르는 최정상급 가수였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행도 했고,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기도 했다. 그런 패티 김이 자신의 인생이 한없이 외롭고 허무해서 서글프다고 한다면 평생을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나이 든 자신을 발견한 부인들의 경우에는 그 공허함이 얼마나 클까?

심한 갱년기 우울증을 경험했던 나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여성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경험을 이야기한다.

갱년기 증후군은 건강이나 젊음과는 전혀 무관하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과 같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내 몸 안의 시계가 일으키는 호르몬 작용 변화로 생기는 증상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부끄럽게 여기지도 말고, 부인하거나 부정하지도 말고 하루라도 빨리 의사와 상담해 적절한 처방이나 치료를 받도록 당부하고 싶다.

건강과 젊음에 자신만만했던 나는 갱년기 따위는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고생을 훨씬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갱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증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2년 넘게 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즈음인 92년 나는 국제소롭티미스트에 가입해 이사로 활동했다. 국제소롭티미스트는 전문직 여성들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여성 자원봉사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서 나는 4년 동안 이사 직을 맡아 각종 후원기금 마련 행사를 여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리고 나와 내 노래가 힘이 될 수 있고, 그 힘을 좋은 일에 쓰겠다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어떤 조건이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공연했다.

30년이 넘도록 가수로만 살아왔던 나에게 어쩌면 세상의 전부는 무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갱년기를 겪으며 나는 비로소 세상을 더 넓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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