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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인권규약 의정서 채택 서둘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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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60년 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 모두가 ‘존엄한 삶’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란 점을 인정했다. 선언은 빈곤과 배제를 차별과, 그리고 기회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 등과 명백히 연계시켰다. 선언의 입안자들은 사회적·문화적 낙인찍기가 공공생활에 대한 폭넓은 참여와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정의를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미리 차단해 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통일된 입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진영의 논리에 의해 훼손됐다. 인권문제도 냉전적 대립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계획경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생존에 대한 필요성이 자유에 대한 열망을 대체했기 때문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목록에 포함된 기본적 필요성이 정책 실현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방 국가들은 자유시장 경제를 방해할 수 있는 이러한 입장에 우려를 표시하며 신중한 재정정책을 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보증서로 간주되는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더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선언의 원칙을 완벽히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포괄적 방법에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동시에 채택하기까지 20여 년이 걸린 것도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영향력 있고 부유한 국가들의 대내외 정책에서는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알파 권리’로 분류됐다. 반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들은 앞으로 확보해야 할 권리로 구분돼 국제사회나 각국의 정책목록에서 하위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두 권리 사이의 불균형에 직면한 상황에서 새 선택의정서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 학대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장치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불평의 메커니즘’이라고 알려진 장치다. 이 메커니즘의 절차는 모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학대의 피해자들은 의정서에 근거해 불평을 제기함으로써 자국 정부가 행하는 학대는 물론, 정부가 무시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않는 학대문제를 폭로할 수 있다. 요컨대 의정서는 고립되고 무력한 개인들이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될 것이다.

의정서는 유엔총회가 채택한 뒤 회원국이 비준하면 효력을 발생한다. 의정서 비준은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와 복지를 향상시킴으로써 인권개선을 위한 프로그램과 정책의 개발에 기여할 것이다. 물론 모든 나라가 다 의정서를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공평하고 바람직한 자세는 세계인권선언의 취지를 수용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상호 의존적이면서도 다 함께 중요한 공포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루이즈 아버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정리=유철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