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法治'의 정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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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회창(李會昌)씨의 신한국당(가칭) 입당을 보는 국민의 시선에는 기대와 아쉬움이 엇갈리고 있다.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전반적으로 법치(法治)보다는 인치(人治)의 인상이 짙고,잘 잡은 목표도 원칙과 일관성이 결여돼 그 정당성마저 훼손되곤 했던YS의 정치에 체계적인 가닥을 잡는데 기여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또 탁류가 흐르는 정치판의 수질을 개선하는데도 그의 법치주의가 한몫을 했으면 하는 것이다.만약 그가 그런 기대에 성공적으로 부응한다면 국민들이 확실한 정치적 선택지(選擇肢)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도 다행스런 일일 것이다.
이회창씨는 평소『법은 정치가 만들지만 일단 법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정치가 법에 묶여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이런 그의 확고한 소신도 기대를 갖게 하는 것중의 하나다.
사실 그동안 정치사는 정치가 법 위에 군림해온 역사였다.정치가 법에 묶이기는 커녕 법이 정치의 시녀가 되어왔음은 두루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러한 정치적 관행은 이번 정부들어서도 자취를 감추지 않았다.때문에 민주정치는 곧 법치주의라 는 인식아래정치도 법에 종속할 것을 요구하는 그의 견해는 너무도 지당한 교과서적 언급이면서도 이즈막에까지 신선감을 주는 것이다.
그는 감사원장과 총리시절,그의 그런 소신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그런 언행일치의 지난 행적은 비록 현실정치가 타협과 절충을 필요악(必要惡)으로 하는세계라해도 그가 개입하는 한 법과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으리란 기대감을 주기도 한다.실은「정치의 법치화」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기틀만이라도 마련하는데 기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정치입문은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왠지 아쉽고 허탈한 느낌이교차하는 것도 사실이다.과연 정치권력은 그 어떤 가치도 흡입해버리고 마는 블랙홀인가.『누가 뭐래도 나는 오로지 내가 걸어온길을 걸어갈 것이며 그것이 나 자신에게도 최선 의 길이다』-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경력으로 보나 그동안 드러난 성격으로 보나 이회창씨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일 수 있다는 느낌을 많은 사람들은 받아 왔다.
그는 법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법률가라 해서 법전과 씨름하는 것만이 정도(正道)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을 실천할 힘이나 지위를 바라는 것도 흠될 것은 조금도 없다.대법원장에 대한 그의 갈망은 물론이고 그가 이미 지낸 감사원장이나 총리직만 해도 그의 경력이나 소신과 별반 위화감이 없었다. 그러나 어떨까.선거를 눈앞에 두고 한 정당의 선거대책위의장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당혹스럽다.선거란 어차피선심과 감언,타협과 양보의 판이 아니던가.법과 원칙을 고집했던그도 별 수 없이 시냇물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아주 겠다고 하고표만 되면 누구에게나 머리를 굽힐 것인가.과연 패배냐 탈법이냐의 갈림길에서도 의연히 법을 택할 수 있을 것인가.
권위란 권위는 하나같이 무너지거나 상처받고 있는 이 시대이기에 그나마 자신을 잘 갈무리해온 한 인물의 정치입문은 그래서 더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그가 자신의 소신을 펼 정치적 포부도 지녀왔음을 알만한 사람은 알아 왔다.그 나름의 심사숙고가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기 어려웠다」는 설명만이 있었을 뿐 그가 그동안 지녀온 현 정부에 대 한 인식을 金대통령과 어떻게 조율했는지가 궁금증으로 남아있는 것도 아쉽다.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해왔던 것은 그가 한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렇다면 국민의 그런 궁금증도 풀어줄 정치적 의무가 있을 것이다.
정부.여당으로선 그의 영입으로 복룡(伏龍).봉추(鳳雛)를 함께 얻은 기분이겠으나 그의 역할이 선거를 위한 「1회용」이거나칼국수의 고명 노릇에 그친다면 그의 불행은 물론,우리 정치의 불행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론 이회창씨 스스로가 그런 불행을 막아야 한다.그 길은 정치에서도 평소의 소신과 원칙을 지키고 특히 이번 선거를 통해 기성 정치인들과는 남다른 차별성을 보여주는데 있다.그의 정치실험이 우리 정치의 발전과 연결되기를 바란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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