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101. 30주년 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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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89년 미국 카네기 콘서트홀에서 공연할 무렵의 필자.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 첫날, 나는 ‘마이 웨이’를 부르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대관 문제로 고생했던 기억, 가수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한동안 노래를 부르지도 못하고 울면서 서 있었다. 간신히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 대기실로 들어가서는 정말이지 목 놓아 울어버렸다. 다음날 공연이 예정돼 있는 가수로서 절대 금물인 일이었지만 복받치는 설움을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렇게 울고 난 다음날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둘째 날과 셋째 날 공연은 완전히 쉰 목소리로 간신히 했다. “이제 패티 김도 한물 갔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며 수군거린 관객도 꽤 있었다고 한다.

1988년 여름, 지난 30년 동안 가수로서의 모든 경력과 이력이 될 만한 자료를 첨부한 대관 신청서를 미국 카네기 콘서트홀에 보냈다. 그러면 콘서트홀 운영위원들이 자료를 면밀히 심사해서 대관 여부를 확정한 뒤 통보해준다는 것이었다.

대관 신청서를 준비하는 데만도 몇 달이 걸렸다. 공연 기록이나 발매 앨범의 사실 여부를 증빙할 만한 자료와 해외 활동이나 수상 경력, 국내외 매스컴 보도 내용, 그리고 국내외 평가기관 및 평론가들의 평가 등 가수 패티 김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모두 찾아 보냈다. 수 개월 뒤 최종 통보가 왔다.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연은 89년 연말에 하기로 했다.

준비와 기다림 역시 지난하고 길었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패티 김이라는 대중가수가 겪어야 하는 설움이 아닌 세계 어느 나라 어떤 아티스트라도 똑같이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프랭크 시나트라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같은 정상급 가수들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카네기 콘서트홀 대관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세종문화회관보다는 훨씬 쉬웠다.

2200석 규모의 카네기 콘서트홀 무대에 섰을 때 객석을 가득 메운 재미동포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보내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몇몇 관객은 흥분해서 “너무 자랑스러워요!” “장하다. 패티 김!”을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또 ‘마이 웨이’를 부르며 관객과 같이 울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고 내 평생 그렇게 울었던 기억은 없었다. 내 공연을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기억할 만큼 패티 김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뭔가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25년 전 한 차례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것은 나로서도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고, 성공적이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다음 드디어 나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 중 하나인 카네기 콘서트홀 무대에 선 것이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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