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시험에 들게 마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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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학 입시에서 논술고사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기에 논술 작성방법을 가르치는 학원을 찾아갔다.가제목을 내놓고 실제로 논술문을 작성해보라고 하는데 추상적이면서도 기발한 것이 많았다.문제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우선 길다란 제시문이 나오고 뒤따라 문제가 나왔다.제시문은 요컨대 인간은 자라면서 좋은 편과 나쁜 편을 구분하게 된다는 내용 같았다.문제는 제시문에 들어 있는 한 대목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그 한 대목에 대한 제시문이 또 나왔다.
출제자의 의도는 스포츠의 페어 플레이 정신을 평가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지만,자신은 없었다.제시문과,문제를 위한 제시문을따로 낸 정확한 의도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음은 학문도 놀이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논하라는 문제였다.학문도 놀이처럼 자유롭고,자발적이고,일상적 삶과 구분되고,일정한 규칙과 질서가 있다는 점이 예문에서 암시됐기 때문에먼저 문제보다 쉬웠다.그러나 역시 보편(普遍)타 당한 문제라기보다 철학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문제 같았다.
다음은 가로누운 4개의 평행선 위에 엇갈리게 사선을 그어놓고언뜻보면 평행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착시(錯視)현상을 현상과본질의 관계로 설명하라는 문제였다.정말 생각이 깊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문제 같았다.열길 물속은 알아 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얘기일까.형체가 있는 것은 다 빈 것이라는색즉시공(色卽是空)의 깊은 뜻을 설명하라는 것일까.차라리 「저는 아무리 보아도 평행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안 일어나는 데요」해버릴까.내가 어쩌 다 이런 시험에 들게 됐나.
선생님들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면 이미 반 이상을 쓴 것이나다름없다고 말한다.그런데 나는 문제의 의미부터 잘 모르겠으니 논술고사에서 좋은 점수받기는 애당초 글렀나보다.
논술고사의 왕국은 프랑스라고 하길래 그 나라 바칼로레아(대입자격시험)의 출제경향을 살펴봤다.거기서는 문제 자체가 명료했다.역시 명료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여론은 정치권력의 안내자가 될 수 있는가.」 「사실은 항상 사실처럼 보이는가.」「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는 「인간사회에서 정당한 폭력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출제됐다.프랑스 극우주의자들이 유대인 묘소를 파헤쳤을 때는 「망각은 인간존재의 필수적 조건인가」라는 문제도 나왔다.
한성대 철학과 안규남 교수는참고자료를 제시하지 않는 이런 단독 과제형 출제가 『논술고사의 꽃』이라고 말한다.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이런 식의 출제로 방향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을까.다른 대학보다 더 어렵게 출제해야 우리 대학의 권위 가 올라간다고 믿는 대학도 있다고 한다.남을 골탕먹이는 취미를 가진 분들이 대학에는 많은가보다.
바칼로레아의 논술 제목은 프랑스 지성의 흐름을 가늠하는 풍향계라고 한다.나를 진땀나게 한 제목들이 실제로 출제되면 글쎄,한국 지성의 풍향계는 어디를 가리키게 될까.아마 난기류(亂氣流)를 나타내겠지.고3생인 내가 너무 능청을 떨었나 .
(수석논설위원)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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