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8. 올림픽 폐막 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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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에 안치된 서울올림픽 성화를 배경으로 ‘서울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필자.

나는 서울올림픽 폐막 공연에도 참가했다. 160개국 20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했던 서울올림픽은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느냐 마느냐를 가늠하는 시험대와 같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올림픽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폐막 공연은 처음 치러보는 초대형 국제행사였다. 공연에서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다. 출연자들은 최선을 다했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근성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폐막 공연 무대에 맨발로 들어갔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구두를 벗어 들고 올림픽 주경기장 중앙에 마련된 무대 단상 바로 앞까지 갔다. 당시 장면을 놓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신는 구두는 절대로 무대 밖에서 신지 않는다는 철칙을 고수하는 나의 결벽증과 연관 지어 생각하곤 한다.

고백하건대 그것은 나의 철칙과는 무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길고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고, 게다가 굽 높이가 10㎝나 되는 구두를 신고 주경기장 입구에서 중앙무대까지 이어진 잔디 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걸 공연 직전에야 알게 됐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맨발로 걸어가 무대 단상 바로 앞에서 구두를 신고 올라갔다.

반주도 문제였다. 그 넓은 주경기장에서 반주가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 놓고 노래를 불렀다. 반주가 흘러나와 내 귀에 들릴 때까지 시차가 있었기 때문에 박자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세계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실수해서는 안 된다,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그 어떤 공연보다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폐막 공연에서 나는 두 곡을 불렀다. 하나는 물론 ‘서울의 찬가’였고, 다른 하나는 ‘사랑은 영원히’였다. 길옥윤 선생이 작곡하고, 패티 김이 부른 노래 ‘서울의 찬가’. ‘서울의 찬가’는 길 선생의 노래이기 이전에, 패티 김의 노래이기 이전에 서울의 노래였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혹자는 “패티 김이 길 선생과 이혼 후 두 번 다시 그가 만든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1995년 ‘이별콘서트’에서 길 선생의 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터무니 없는 말이다. 서울올림픽 성화가 안치되던 날, 올림픽 폐막 공연이 있던 날 내가 부른 노래는 대체 누가 만든 노래란 말인가?

노래는 작곡가에 의해 탄생해 가수에 의해 완성된다. 길 선생이 만들고 내가 부른 많은 노래가 길 선생의 곡인 동시에 나의 노래다. 나는 길 선생과의 개인적 문제 때문에 노래를 망가뜨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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