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무협소설 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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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해괴하고 기이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사회에선 탐정소설이나 추리소설 따위가 즐겨 읽히지 않는다는게 정설이다.추리소설의 묘미가 트릭과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면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해괴하고 기이한 사건들은 트릭과 결말의 의외성 에 있어 항상 추리소설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논리는 혼란과 격변의 시대에 전체적으로 소설이 읽히지않는 현상과도 궤를 같이 한다.세상 돌아가는 게 워낙 변화무쌍하다 보면 소설 속의 허구(虛構)보다 생생한 현실에 흥미와 관심이 쏠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온 국민을 깜짝깜 짝 놀라게 한사건과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소설이 침체의 늪 속에 빠졌던지난 한해가 좋은 예다.
그렇다면 지난 연말부터 무협소설이 느닷없이 붐을 이루고 있는현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우리 사회에서 무협소설이 즐겨 읽히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 중국 무협소설을 번안한 김광주(金光洲)의 『정협지(情俠誌)』등 몇 작품이 계기였지만 본격적인 붐이 조성된 것은 80년대 이후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작가김용(金庸)의 『영웅문(英雄門)』등이 번역,소개되면서부터다.
5공말기인 80년대 중반 중국 무협소설이 우리 출판계를 완전석권했을 때 문단에선 한결같이 우려를 나타냈다.한 중진 비평가는 『국민들의 좌절감과 정신적 무력감을 반영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라 진단했고,어떤 중견 작가는 『긴장과 좌 절과 허무주의에 대한 일시적 위안을 무협소설에서나 얻고자 하는 현상』이라 개탄했다.대개의 무협소설들이 첨단 과학시대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황당무계한 내용이고 보면 무협소설 붐이 사회의 여러가지 현상과 무관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무협소설에의 탐닉이 읽는 이의 의식과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견해도 중국 현대 무협소설의 발생과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정협지』 등의 원전(原典) 작가인 와룡생(臥龍生)은 장제스(蔣介石)휘하의 장교 출신이며,대만정부는 대중 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스포츠.영상매체와 함께 무협소설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의 붐이 「정치현실에 대한 실망과 환멸」탓이라는 견해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수많은 국민들이 무협소설로 인한 의식과 감각의 마비로 정치를 외면한다면 정치인들은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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