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94. 어머니의 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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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 영전에 필자가 2004년 바친 가스펠 음반 ‘지금까지 지내온 것’.

오빠와 언니들이 결혼을 하고, 하나 둘 이민을 가면서 내가 어머니를 줄곧 모셨다. 길옥윤 선생과 결혼한 뒤에도 모셨으니 자식들 중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가장 길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모신 게 아니라 어머니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작은어머니를 들여서 이른바 딴살림까지 차렸지만 8남매 모두를 끝까지 품 안에 두었던 어머니, 전쟁 통에 두 차례나 피란 길에 오르면서도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어머니, 가수가 되겠다는 딸에게 “나는 내 딸을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누구보다 큰 지지를 보내준 내 사랑하는 어머니!

장성한 아들·딸들이 하나 둘 외지로 나가면서 어머니는 자식들이 당신 품 안에서 영영 떨어져나가는 느낌을 받았을 게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새벽이면 멀리서 울려오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반년 이상을 새벽마다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종소리를 들으며 교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당신 스스로 교회에 찾아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기독교 신자가 된 어머니는 나에게도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다른 신도들에게 ‘내 딸이 패티 김’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패티야, 교회에 가서 네 그 우렁찬 목소리로 찬송가를 한 번 불러주면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냐? 하나님 찬양하는 네 목소리 한 번 들어보는 것이 내 소원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집 세기로는 대한민국 둘째라면 서러운 나는 스스로 마음이 동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는 어머니의 부탁에도 내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에요”라며 미루기만 했다. 어머니가 별세한 뒤 가장 후회 막급한 일이 바로 그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신앙생활은 하지 못하더라도 어머니가 그렇게 바랐는데, 어느 하루 교회에 가서 찬송가는 한 번 불러드릴 것을···.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 업인 내가 왜 그 소원을 못 들어드렸을까? 지금도 뼈 속 깊이 후회하고 있으며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 생전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씀했던 것도 못 들어드리고, 임종도 보지 못한 나는 2004년에야 비로소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교회에 가는 대신 어머니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내가 부른 찬송가를 담은 앨범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어머니 영전에 바친 것이다.

어머니의 소원을 25년이 지나서야 풀어드린 나는 참 못난 딸이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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