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살 길이 안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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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구 리 9단 ●·최철한 9단

제4보(52∼64)=대마는 함몰 직전이라도 흑▲의 장문은 기분 좋다. 조금 있다 삼수갑산에 갈지언정 우선은 55, 57의 회돌이가 신난다(58-이음). 바둑이란 수담(手談)은 이렇게 한쪽이 스트레스를 풀다 보면 그 감정은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진다. 구리 9단 쪽은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잠시 멋을 부리다가 완벽한 작품에 흠이 가게 된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런 작은 앙금이 감정에 희미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한 가지가 있다. 57까지의 회돌이는 흑에 상당한 이득을 안겨줬고 동시에 아래쪽 백대마를 원거리에서 포위하고 있다. 백도 조금은 압박감을 받게 되었다는 얘기.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마가 죽으면 다 부질없는 일이고 대마는 곧 죽게 생겼으니까 상황은 여전히 지옥이다. 눈앞에 보이는 100개의 문 중 99개는 사문(死門)이고 겨우 한 개 정도만 생문(生門)이니까 발을 잘 내디뎌야 한다. 59쪽이 선수가 된 것, 혹시 여기에 1%의 살 길이 숨어있을까. 최철한 9단이 고심 끝에 61로 진출하자 구리는 즉각 62로 막아선다. 흑은 매수 가시밭길인데 백은 다음 수가 척척 떠오른다. 63엔 64. 다 끓은 국이 행여 쏟아질까 극도로 조심하는 수.

“아무래도 모양이 너무 나쁘네” 한 사람은 서봉수 9단. 진흙탕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서 9단이지만 흑 대마가 사는 길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백은 A나 B가 모두 선수다. 도무지 비빌 언덕이 없다.

신예 중에서 전투의 화신으로 떠오른 김지석 4단에게 살 길이 보이냐고 묻자 고개를 흔들며 묵묵히 돌만 놓아보고 있다. 분위기는 거의 사망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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