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증언거부와 計座뒤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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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규하(崔圭夏)전대통령의 증언거부에 이은 검찰의 은행계좌 추적으로 「이래서야 어디 은행에 예금하겠나」 하는 푸념까지 등장한다.우리는 12.12와 5.18의 결정적 시기에 현직 대통령이었던 분이 당시의 정황을 소상히 밝힌다면 다른 어떤 증언보다무게가 있고 책임있는 역사청산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본다.그러나 당사자가 굳이 입을 열지 않겠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崔씨 개인이 책임질 몫이다.「재임시 국정 행위에 대해 일일이 조사를 받는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는 주장 또한 나름대로 일리는 있다. 그래도 꼭 崔씨의 증언이 필요하다면 법정증인으로 채택하거나강제구인하는 법적 절차가 가능하다.그런데 어째서 두차례 증언거부가 있자마자 175억원 수수설이 야당의원에 의해 제기되고 곧이어 검찰이 예금계좌 뒤지기에 착수하는지 그 까 닭을 알 수 없다.보도로는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으면서 崔씨쪽 계좌도 슬쩍 끼워넣었다고 한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崔씨 계좌추적은 억지춘향이다.검찰로선 崔씨 하야가 신군부에 의한 강압의 결과였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무언가 뒷거래가 있었으리란 짐작과 민주당쪽의 175억원수수설을 근거로 예금계좌 조사에 나섰다고 말할지 모른다.그러나비자금파동 이후 얼마나 근거없는 폭로와 설이 난무했던가.그러면검찰은 그때마다 폭로의 진상과 설의 근거를 남김없이 추적했는가. 과거청산이라는 역사적 작업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현실의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엄정한 법집행보다 여론재판에 편승할까 걱정된다.확실한 근거와 자료가 있다면 별 문제이나 단지 의혹이 제기되고 검찰조사에 불응한다고 계좌추적을 한다면 이야말로 고의적 상처내기요,괘씸죄 다스리기가 된다.아무리 요즘 전직대통령들의 위신이 말이 아니지만 국법상 특별예우의 대상인 전직 대통령의 계좌를 확실한 범죄혐의의 근거없이 추적해서야 되겠는가.
역사청산이란 목표가 선하고 옳다 해서 과정과 절차가 무시되거나 제멋대로여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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