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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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름다운 벽돌집들이 눈 아래 펼쳐졌다.코펜하겐이다.
오후4시.눈 내리는 겨울철이면 이미 어두울녘이지만 지금은 백야(白夜)의 여름.연푸른 제비꽃 빛으로 하늘은 내내 깨어 있다. 백야의 북구(北歐)는 처음이다.가슴이 설레었다.
서울에서 코펜하겐까지… 지구를 반바퀴쯤 달려온 셈인가.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형상의 거리가 아니다.지금까지의 생활에서 멀리 멀리 떠나온 마음의 거리다.
남편도 아버지도 농장집도 가물가물 멀다 못해 보이지 않는다.
둘레의 존재를 하나의 서랍에 쓸어넣어 닫아버린 느낌이다.
여행은 이래서 해방감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리영은 정신없이 바빴다.막상 외국에 다녀온다고 생각하니 서울에 오갈 때와는 달리 챙겨야 할 것이 너무나많았다.집안 청소도 꼼꼼히 하고,아버지와 남편의 옷가지도 손질하여 손 닿는 곳에 놓았다.냉장고 안도 정리하고 ,1주일치 식단도 마련했다.농장 아줌마와 애소를 불러 살림살이 당부도 했다.기껏해야 닷새가량 다녀오는데 이렇게 알뜰히 챙기고 부산을 떠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묘했다.
아버지의 승낙도 얻었다.린드그랜 여사의 전시회가 있어 초청받은 것으로 했다.그것은 깡그리 거짓말은 아니었다.오랜만에 전화한 아리영을 그녀는 몹시 반기며 전시회 개최중이라 귀띔해준 것이다. 남편은 처음부터 이견(異見)이 없었다.그런 남편이 처량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부부의 고리는 이미 낱낱이 풀어져버린 것이다.
카스트럽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아름답고 청결한 거리 거리,꽃이 가득한 집집의 창가.그런 풍경들이 아리영을 차분하고 행복하게 했다.마치 풍요로운 고향에 돌아온 것같은 기분이다.외국에서 「고향」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변호사가 일러준 호텔은 드넓은 광장 공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왕궁과 왕립극장이 이웃에 보였다.코펜하겐에서도 으뜸가는 격식 높은 호텔이다.
아리영 방은 따로 예약돼 있었다.
한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꽃바구니가 아리영을 맞아주었다.「M」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꽃 사이에 끼어져 보였다.우변호사가 보낸것이다.연초록의 커튼과 양탄자가 꽃바구니를 더욱 화려하게 돋보여주고 있었다.
짐을 풀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문을 열자 우변호사가날렵한 짐승처럼 들어와 아리영을 으스러지게 안는다.눈물이 치솟았다.이 품에 안기기 위해 이렇게 멀리 달려온 것이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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