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 청와대·국정원 살펴 … 주식도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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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대화 내용 및 김대중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회담 일화 등 숨겨졌던 뒷얘기를 공개했다. 다음은 임 전 장관이 회고록에서 밝힌 주요 내용이다.

◇“‘여인천하’ 인상적”=2002년 4월 4일 나는 대북 특사로 평양의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 위원장과 5시간 동안 만찬을 가졌다. 김 위원장은 남한 대중문화와 주식시장 상황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나는(김 위원장) 인터넷 야후를 통해 청와대·국정원·통일부를 자주 들어가 본다. 청와대 사이트엔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역대 대통령 자료가 잘 정리돼 있다. 부대를 방문할 때 지방에 묵으면서 밤에 인터넷으로 남쪽 TV 뉴스를 볼 수 있어서 편리하고 좋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대단히 잘 만든 영화다. 군 장성과 당 간부에게 보여줬다.”

김 위원장은 이때 배석했던 이명수 작전국장(북한군 대장)과 김용순 비서에게 “남쪽의 TV 사극 ‘여인천하’는 몇 편까지 봤느냐”고 갑자기 물었다. 두 사람은 각각 30편과 29편까지 봤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여인천하’가 매번 마지막 장면에 여자 주인공의 표정을 부각시키는 게 인상적”이라며 “사극은 남쪽에서 잘 만든다. 당 선전부장에게 남쪽 것을 배우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김연자가 공연 하러 오는데 내가 특별히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과 나훈아의 ‘갈무리’ 등 남쪽 노래 6곡을 신청했다”고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남한의 대선 전망을 물은 뒤 “박근혜 의원을 한번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한·미 정상의 ‘무알코올’ 건배=2002년 2월 20일 방한한 부시 대통령과 김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저녁 청와대 세종실에서 비공개 만찬을 가졌다. 김 대통령이 흰 포도주 잔으로 건배를 제의하자 부시 대통령은 “나는 크리스천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젊었을 때 술 많이 마시고 방탕하던 나를 아내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게 해 줬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러면서 경호원으로부터 맥주 캔을 넘겨 받아 “이건 알코올 성분이 없는 맥주로, 이것으로 건배하자”고 제의했다. 오전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은 자기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악랄한 독재자다.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 넣어 북한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네오콘이 장악한 부시 행정부”=2002년 9월 25일 밤 김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10월 초 제임스 켈리 차관보를 평양에 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직후 나는 미국이 대화에 나선 것 아니냐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10월 2일 서울에 온 켈리 특사는 굳은 표정으로 내게 발언 요지문을 꺼내 읽으며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계획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으며, 이를 폐기하라고 통보하기 위해 평양에 간다”고 말했다. 2박3일의 평양 방문을 마치고 내려온 켈리 특사는 5일 다시 만났을 때 “북한의 발언과 태도에 경악했다”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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