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우리아이들지상상담>학습 탈진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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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 세상에 공부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나라는 없을까요?』 『글쎄…그런데 왜 그런 나라를 찾지?』 『당장 이민가게요.그런 나라가 있다면….』 공부도 하기 싫고 학교도 다니기 싫다며 상담실을 찾아온 혁수(고교 2년생)는 서울 강남의 소위 명문고 입학 당시만 해도 전교 수석을 차지한 수재.1학년 2학기부터 성적이 자꾸 떨어지더니 2학년 2학기가 되자 학급석차 40등 밖으로 밀려났다.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만사가 시들하다.운동도,TV도,친구도 싫다며 그냥 혼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니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직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대로 공부벌레가 돼 1등을 놓친 적이 별로 없던 아이.그러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와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지자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다.무가치한 일에 몰두하는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그저 가만히 있고싶을뿐 하고 싶은게 전혀 없다는 얘기다.
주로 어른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소진(燒盡.Burnout)현상」이 혁수한테 나타난 것이다.공부에 대한 개인적 가치나 동기를 재음미하는 과정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는 청소년,특히 중3에서 고3 사이에 이런 증상이 종종 나타난다.이런 소진상태가 계속되면 심리적 장애나 질병.문제행동 등이 발생하고 심하면 학업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생긴다.
혁수가 이런 소진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그동안의 고통과 인내에 대한 위로.너무 지친 사람에게 위로는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 된다.충분히 위로한 뒤 학교공부와 장래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공부와 일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가를 거듭 이야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너무 당연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여겼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가족,특히 부모님과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도록 했다.아무리 시시한 생각이라도 친구.가족들과 남김없이 말하는 사이 하잘 것 없는 것같은 잡담도 얼마나 소 중한지 느끼면서 「의미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로이 깨닫게 했다.
이제 혁수는 가끔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거나 잠깐씩 공원을 산책한 뒤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그저 편안히 쉬고 논다는 것,그리고 아무 쓸모없는 듯한 짓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걸 차츰 실감하면서 다시 학교공부에 정진하고 있다 .
박성수〈청소년 대화의 광장 원장.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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