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7> 멈추는 게 두려운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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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 석가모니 당시에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앙굴리말라’. 그는 무려 999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엄지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죠. ‘앙굴리말라’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목걸이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정작 그의 본명은 ‘아힘사’였습니다. ‘해치지 않는 자(不害)’라는 뜻이죠. 착하고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부인이 그를 유혹했죠. 거절하자 부인은 “나를 겁탈하려 했다”며 오히려 그를 모함했습니다. 화가 난 스승은 그에게 엉뚱한 가르침을 내렸죠. “1000명의 사람을 죽여 목걸이를 만들면 해탈을 이룬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고 ‘아힘사’는 ‘앙굴리말라’가 되고 말았죠.

앙굴리말라는 마지막 희생자를 찾고 있었죠. 한 사람만 채우면 1000명이 되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부처님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석가모니는 길을 가고 있었죠. 뒤에서 칼을 든 앙굴리말라가 외쳤습니다. “멈추어라!” 그러자 석가모니가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멈춘 지 오래됐다. 멈추지 않고 있는 이는 바로 너다.” 그 말을 듣고 앙굴리말라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석가모니의 제자가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석가모니는 왜 ‘멈춤’을 말했을까요. 또 앙굴리말라는 왜 ‘충격’을 받았을까요. 사람들은 ‘멈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멈추는 순간, 뒤처지고, 낙오하고, 실패할 거라 여깁니다. 더욱 본질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온전히 멈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멈춤’은 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죠.

그런데 석가모니는 “멈추라”고 했습니다. 뭘 멈추라는 걸까요. 바로 ‘에고의 멈춤’이죠. 사람들은 따지겠죠. “거 봐, 맞잖아. 무한경쟁 시대에 에고가 멈추면 어찌 살라고.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일하고, 치열하게 싸워도 역부족인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겠죠.

그런데 ‘멈춤’을 말한 이는 또 있습니다. 세계적인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60)는 “당신이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해질 때 지혜가 바로 거기 있다. 그러니 고요함이 당신의 말과 행동을 이끌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또 지두 크리슈타무르티(1895~1986)는 “명상하는 마음은 침묵한다(A meditative mind is silent)”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이 상상할 수 있는 침묵이 아니며, 고요한 저녁의 침묵도 아니다. 그것은 일체의 생각을 ‘멈추었을 때’ 이루어지는 침묵”이라고 덧붙였죠.

대체 뭘까요. ‘멈춤’의 자리에 뭐가 있을까요. 톨레는 “거기에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그걸 ‘반야의 지혜’라고 불렀죠. 그래도 사람들은 반박하겠죠.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살면서 나도 지혜를 터득하잖아”라고 말이죠. 그런데 ‘나의 지혜’는 한계가 명백합니다. 그건 ‘나의 세상, 나의 영토’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나가 멈춘 자리의 지혜’는 다릅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왜냐고요? ‘나’라는 테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죠. ‘나’라는 테두리가 없을 때,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무한한 우주에 꽉 차겠죠. 거기서 나오는 지혜, 거기서 나오는 사랑, 거기서 나오는 온유함의 크기를 과연 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멈추라”고 한 거죠. 또 앙굴리말라는 그 말에 무릎을 꿇은 거죠.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죠. ‘내 이웃이 내 몸이 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나가 멈추는 순간’이죠. 오직 그 순간, 이웃이 내가 되죠. 그러니 예수의 사랑도, 부처의 자비도, 톨레의 지혜도, 크리슈나무르티의 침묵도 마찬가지죠. 모두 ‘나가 멈춘 자리’에서 샘솟는 거죠.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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