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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 상징의 힘, 그리고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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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은 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제철소를 건설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당시 군 출신었던 그의 별명은 ‘독일 병정’. 별명답게 그는 그 일을 마치 전쟁 치르듯 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립 멤버 9명이 머무를 임시 사무실의 이름도 롬멜 하우스였다. 작업이 난관에 부딪쳤을 때마다 거론했던 것도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則生·죽기를 각오하면 산다) 정신이었다. “제철소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실패하면 현장사무소에서 나가 바로 우향우 해, 다 같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건설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비유와 상징은 박태준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정 회장은 모든 상황을 입찰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건설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입찰에서의 성공 여부였다. 정 회장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1등 아니면 다 꼴찌다.” 이 일등주의 문화는 현대그룹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임직원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을 하려고 애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찰에 대한 비유와 상징은 정치인 정주영의 실패를 자초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필생의 도박을 감행했다. 경제를 일으켜 세운 자신이 경제의 발목을 잡는 정치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30여명에 이르는 국회의원을 거느린 정당이 있었다.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해 대선에 패배한 자신을 보호해줄 소중한 방패막이였다. 그런데 정 회장은 어이없게도 그 정당을 버리고 말았다. 입찰에서 1등을 못한 이상 입찰 준비팀을 더 이상 가동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후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물론 그에게 배신당한 정치인의 보복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모든 리더는 비유와 상징을 동원한다. 어떤 이는 모든 상황을 전쟁으로 이해한다. 반면 어떤 이는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한다. 비유와 상징에 따라, 리더의 자리도 달라진다. 위풍당당한 장군이 되는가 하면 고독한 마라톤 주자가 되기도 한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리더들은 상황 자체를 자신의 비유와 상징으로 이해하려고 든다. 그것이 상황에 꼭 들어맞는 경우라면 결과는 성공이다. 그러나 상황에 맞지 않을 경우 참담한 실패를 낳을 수도 있다.

성공한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의 비유와 상징은 기업이다. 자신은 기업을 이끄는 CEO다. 이런 비유와 상징으로 그는 성공한 서울시장이 됐다. 대통령이 되자 그의 비유와 상징은 더욱 강해졌다. 국민 정서나 여론의 반대쯤은 별 것 아니라고 여기게 됐다. 더욱이 문제가 있는 곳에 자신이 직접 얼굴을 내비치면 만사형통일 것이라는 자신감마저 갖게 됐다. 그래서 바깥으로 동분서주 하지만, 차분히 앉아 권력 내부를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청와대와 내각 재산 공개 파동 직후 또 미국산 쇠고기 시장 개방 문제로 위기를 겪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통령 자신의 비유와 상징을 통해, 현재 상황을 파악해보자. 새 사장이 취임했다. 이 사장은 기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호통을 친다. ‘어디 먼지가 많으니 닦아라’, ‘누구는 왜 그렇게 게으르냐?’ 등등.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경영자의 결정이나 판단은 뒷전이다. 그러니 임원들도 갈피를 못 잡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사장이 할 일은 자명하다. 사장이 됐다는 것을 알리고 과시하는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대신 자기 내면으로 침잠해 해야 한다. 할 일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임원들을 그 일에 제대로 할당하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과정에서 대통령은 단순히 기업 경영자나 서울시장보다 훨씬 더 심고원려(深考遠慮)가 필요한 자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김방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