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여행>聖域-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왕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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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聖域은 본디 「성인(聖人)의 경지」,또는 「성인의 범주」로서「사람」을 대상으로 한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었다.기록에 의하면聖域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요순(堯舜)이나 공자(孔子)같은 인물 정도에 불과했다니 대단한 경지임을 알 수 있겠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신성한 지역」이라는 뜻으로 바뀌어 어떤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게 됐다.물론 여기에는 전제군주 시대의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 임금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절대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이 때부터 그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존재로 인식됐으며,「聖」은 곧 「임금」을 상징하게 돼(聖德.聖恩.聖節.聖旨.
聖寵 등) 聖域이라면 임금과 관계되는 「신성불가침 의 지역」을뜻하게 됐다.대체로 궁궐(宮闕)이나 종묘(宗廟).왕릉(王陵).
출생지 등으로서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聖域임을 표시하고 말에서 내릴 것과 함부로 접근하지 말 것을 명했다. 후에는 범위가 넓어져 성인은 물론 고관.장군들의 출생지나 무덤 따위도 聖域으로 지정해 하마비를 세우곤 했다.지금은종교적인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민주화가 된 지금 聖域의 범주도 많이 바뀌었다.청와대는 이미 聖域에서 제외됐으며 과거의 聖域이었던 왕궁은 지금 명승고적으로 지정돼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됐다.다만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 의 묘역이나특정 사당(祠堂)만이 聖域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聖域없이…」라는말이 등장하곤 하는데 도대체 무슨 聖域이 또 존재하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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