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落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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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왜 나는 늘 서울에서 실패하면 고향을 찾는가.고향에 내려가이런 회의속에 빠져들면서 쓴 것이 이 작품이다.』 1960년대한국 문학을 화려하게 장식한 소설가 김승옥(金承鈺)은 64년 고향에 내려가 대표작 『무진기행(霧津紀行)』을 쓰고 난후 그 집필 배경을 이렇게 술회했다.이 작품속의 「무진」은 물론 지도상에 나타나는 지명이 아니다.작가 자신의 말을 빌리면 「전남 순천과 순천만에 연한 대대포(大垈浦)앞바다와 그 갯벌」이다.그곳은 안개에 휩싸인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陰險)한 상상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소설속에 나타나는 「무진」이 김승옥 자신의 고향이기는 하지만그가 찾아가 소설을 쓴 곳은 어머니의 품속같은 안식처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삶에 대한 무력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음험한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한 곳이었다.그 같은 고향의 역설적 이미지가 김승옥으로 하여금 대표작을 낳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낙향이란 편안하게 쉰다는 뜻을 내포하긴 하지만 나이로나 지위로나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에 고향에 돌아간다는 것은 삶의패배나 실패를 뜻하기도 한다.왕조시대때 죄를 지었거나 잘못을 저지른 관리들의 벼슬을 삭탈해 제 고향으로 쫓아 보낸 방축향리(放逐鄕里)제도가 좋은 예다.그것이 뒤에 「귀양(歸鄕의 뜻)살이」로까지 발전했거니와 고향에 내려보내는 것이 형벌의 한 방편이었음은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따지고 보면 고향이니 시골이니 하는 것은 서울살이와 상대되는개념이요,서울살이가 온갖 명리(名利)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면고향살이는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다는 차이뿐이다.그래서 현대적의미의 낙향이란 할 일 다하고 이젠 더 바랄 것이 없게 된 사람들이 노년을 한가롭고 편안하게 보내려는 방편으로나 제격일 따름이다. 한데 어쩐 일인지 요즘 낙향이 마치 귀양살이나 되는듯전(前)대통령 부정축재 파동의 해결방안중 하나로 자주 거론되고있다.그처럼 천문학적 숫자의 돈을 챙기고도 사과나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그 해법(解法)의 발상부터가 한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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