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 문화

열매를 맺음에 대하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하지만 예술의 길이 어찌 어린 날 콩쿠르 하나로 모두 결정날까.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비애가 더 큰 예술의 세계를 조우할 기회를 주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예술가의 인생에서 보아 왔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추앙받는 루마니아 태생의 클라라 하스킬의 인생이 꼭 그렇다. 소련 피아노계의 대모라 불리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잘츠부르크에서 세계적 거장 카라얀의 무대를 보기 위해 연주회를 찾았다가 클라라 하스킬의 모차르트 연주를 들었다. 그 후 그는 소련으로 돌아가 감동에 벅차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몸은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자 카라얀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스킬은 천상의 소리라는 찬사와 전무후무한 모차르트 전문가라는 칭송을 받은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다. 하지만 18세 때 세포끼리 붙어 근육이 뭉치거나 경화되는 질병인 세포경화증을 앓아 곱추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도피 생활을 하다 극심한 공포와 긴장으로 뇌졸중까지 앓았다. 그러나 어떠한 인생 역경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의심 없는 사랑으로 피아노 곁을 떠나지 않았고 진정한 겸손의 마음으로 피아노와 관객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 그의 연주를 들은 관객들이 갈채를 보내면 그는 수줍어하며 “미화원이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조용히 뇌까리곤 했을 정도라고 한다. 순간에 자만해서도, 영원히 좌절해서도 그런 예술의 깊이와 인생의 겸허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실에서 스승의 호된 가르침에 눈물 흘리던 아이들이 하나씩 노력의 결실을 맺으며 제 이름을 내 건 연주회를 열고 있다. 콩쿠르의 긴장감보다 더 큰 책임을 진 무대에 선 사회인으로의 성장을 보는 스승의 마음은 감격스럽다. 그러나 하나의 관문을 벗어나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선 그 아이들을 더 큰 예술의 길로 인도해주지 못하는 사회와 상업과 마케팅이라는 논리로 음악에 대한 사랑 대신 헛된 욕망만 불어넣는 공연기획자가 더 많은 현실은 안타깝다. 스승은 무대 위의 참예술을 가르쳤건만 세상은 자꾸만 타고난 재주를 부려 무대를 팔라고 가르친다.

피아노란 종래에 그 사람의 인생을 담아내는 도구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으로 남지 않는다. 처음에는 타고난 재능의 덕을 보아 재주 하나로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어도 그것은 순간이다. 클라라 하스킬의 가슴 저미는 연주는 평생을 거쳐 몸과 마음으로 살아 견뎌온 인생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 피아노를 다루는 기술에만 있지 않다. 진정한 감동은 그런 데서 나온다. 피아노를 배우겠노라 찾아오는 학생들이, 또는 이미 나의 휘하를 벗어난 제자들이 무대의 화려함만을 좇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인생 그 자체가 음악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바란다. 그렇게 맺은 열매는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음악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의 가슴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누군가의 인생도 바꿔놓을 수 있다.

며칠 뒤면 라흐마니노프 국제 콩쿠르 심사를 하러 떠난다.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밤낮을 건반과, 자신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세계 각국의 피아니스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그중에 미래의 라흐마니노프가, 클라라 하스킬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그것이 수단이 되어서는 예술로 키워낼 수 없다. 공연기획자들이 예술가 이상으로 피나는 자기 성찰과 깊은 사명감 없이 영재들의 한때 영광을 이용하려고 달콤한 말로 설익은 열매를 따려 하면 예술은 살아남을 수 없다. 순수한 열정 하나로 피아노 앞에 앉은 아이들은 더 큰 열매를 품은 씨앗으로 자라야 한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