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리처드 홀브룩 칼럼

이스라엘 탄생을 둘러싼 워싱턴의 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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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스라엘 탄생 60주년을 맞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이에 대한 대응을 놓고 워싱턴에서 벌어진 거대한 싸움이다. 이스라엘 문제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조지 마셜 국무장관을 비롯한 대다수의 외교정책 당국자 사이에 가장 심각한 불협화음을 야기했다. 20년 후 나는 당시 트루먼의 자문역이었던 클라크 클리퍼드의 자서전 출판을 도왔다. 이때 이스라엘 독립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과 생존해 있던 관련자 전원을 인터뷰했다. 당시 찬반 양측의 전선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끄는 유대 조직은 14일 자정을 기해 새로운 유대 국가의 탄생을 선언하려 했다. 아랍 국가들은 그럴 경우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했다. 유대 조직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 둘로 나누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팔레스타인을 유엔의 신탁통치로 넘기려는 영국의 계획을 지지했다.

그해 3월 트루먼은 사적으로 훗날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된 차임 바이츠만에게 분할 방안의 지지를 약속했다. 트루먼은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이미 유엔 신탁통치안에 찬성표를 던진 사실을 알았다. 분노한 트루먼은 자신의 수첩에 이렇게 썼다. “국무부가 내 계획을 망쳐놨다. 신문을 읽고서야 알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나는 거짓말쟁이에 배신자가 됐다. 여태껏 내 인생에 이렇게 무기력한 날은 없었다.” 트루먼은 유엔담당 딘 러스크 국장 등 국무부 관계자들을 비난했다.

이들이 이스라엘 독립에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석유와 숫자, 그리고 역사였다. 국방장관 포레스탈은 클리퍼드에게 말했다. “한쪽에 3000만의 아랍인이 있고, 다른 한편에 60만의 유대인이 있다. 당신은 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12일 트루먼은 백악관에서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국무부의 마셜 장관과 러베트 부장관은 독립국가 인정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반대였다. 트루먼은 젊은 참모 클리퍼드에게 의견을 물었고, 그는 즉각적인 독립국가 인정을 주장했다. 그러자 마셜이 폭발했다. “이 문제는 외교정책 사안이다. 국내 문제 자문역인 클리퍼드가 도대체 왜 여기 있는가? 그가 있는 유일한 이유는 정치적인 고려를 압박하려는 것이다.” 마셜은 회의 후 “만약 대통령이 클리퍼드의 의견을 따른다면 나는 다음 대선 때 대통령을 찍지 않을 것”이라는 글도 남겼다. 클리퍼드는 “내가 들은 발언 중 대통령에 대한 가장 놀라운 협박이었다”고 회고했다. 회의는 혼란 속에서 연기됐다. 이틀 동안 클리퍼드는 마셜이 이스라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방법들을 찾았다.

트루먼은 14일 오후 6시11분 유대 국가의 독립을 인정했다. 텔아비브에서 벤구리온의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1분 뒤였다. 결정이 급박하게 이뤄져 타이프로 친 ‘유대 국가’ 대신 클리퍼드가 ‘이스라엘’이라고 손으로 고쳐 쓴 공식 성명서가 배포될 정도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이스라엘을 인정한 첫 번째 국가가 됐다.

클리퍼드는 나에게 “내 입장의 근원은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도덕적 확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많은 사람이 마셜과 러베트가 옳았고, 트루먼이 이스라엘 독립을 인정한 진짜 이유는 국내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단지 골칫거리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시각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인정했든 안 했든 실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선언 초기에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의 생존은 훨씬 큰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외교 당국자들이 반대했을지라도 트루먼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오늘날 복잡다단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모든 미국인이 인정하고 존경해야 할 결정이다.

리처드 홀브룩
정리=김정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