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도큐먼트 명예자원활동가 이병진 씨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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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이곳에서 개그맨 이병진씨를 만났다. 평소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시민들 틈에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레 섞여 있었다. 스타를 만나러 온 몇몇의 취재진만이 그가 유명인임을 짐작케 했다. 답사 내내 세운상가 곳곳을 카메라에 담는 그의 눈빛에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이병진 씨는 이번 프로젝트의 명예자원활동가로 참석하게 됐다고 한다. 세운상가에 얽힌 그의 추억담과 그의 사진이야기까지 들어봤다.

Walkholic(이하 WH) 어떻게 ‘명예자원활동가’로 참여하게 되었나?
이병진: 문화우리의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얘기를 듣고 나니 참여 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 제안을 수락했다. 세운상가의 마지막 역사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벅차게 다가왔다. 물론 그날 현장은 어수선하고 집중하기 힘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한두 번 더 촬영일정을 잡고 있다.

WH 서울에서 사라지고 말 풍경들의 목록 첫 자리에 세운상가가 서 있다. 어떤 느낌이었나? 특별히 인상에 남는 곳은?
이병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안타깝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기 흉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낡아가는 것들의 미학도 있는 법이다. 세운상가의 역사와 의미를 모른다면 더없이 흉물스럽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운상가에 얽힌 사연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 보았다면 개보수를 해서라도 끝까지 남기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게다가 그 안의 상인들 그리고 인생의 여러 이야기들은 철거라는 이름으로 모두 무너뜨리기는 무척이나 살갑고 여전히 정겹다. 사실 철거 직전의 모든 곳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아직 다 촬영을 마친 상태가 아니라서 조금 더 둘러봐야 하지만, 세운상가와 종묘의 어우러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오래된 계단과 삭발한 머리를 모자로 감추었던 상인협회장의 머리, 따듯한 봄날의 태양이 내려앉았던 옥상정원의 느낌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WH 세운상가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이 있나?
이병진: 글쎄.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서 많이 갔고, 나중에는 혼자서도 여러 번 찾곤 했다. 아버지가 전자계통의 일을 하셨다. 아버지 주변에 세운상가에서 일하는 분들도 많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점들, 그 안에서 삶을 일구는 상인들의 모습…. 어려서부터 그런 걸 보고 자랐다. 아저씨들과 함께 시켜 먹었던 자장면도 생각난다. 어린 나를 유혹과 호기심에 번민하게 만들었던 여러 가지 소품들, 세운상가를 가득 메운 다양한 물건들, 모두 나의 추억 속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때는 세계 속의 전자박사들은 다 세운상가에 있어 그들이 모이면 태권브이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정말로!(웃음) 이 모두가 어린 내게 있어서는 세운상가의 판타지들이었다.

WH ‘개그맨 겸 사진작가’다. 사진이야기를 좀 해보자. 주로 어떤 사진들을 찍나?
이병진: 나를 어찌 부르든 모두 내게 잘 맞는 직업이다. 사진은 코미디를 뺀 전부다. 아마추어 작가니까 특별한 장르에 갇혀 있지 않다. 아마추어의 특권이다. “그냥 좋아서 해요” 라고 말하면 다 통한다. 좋은 감정이 담겨 있으면 좋은 사진이 되는 것 같다.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 때 찍은 사진들이 대단히 예술성이 있는 작품 사진들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모두들 그런 사진은 소중하게 간직한다. 추억이 있으니까. 그런 사진이 좋은 사진 아닐까? 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사진들, 나만의 작품 사진들, 그런 걸 찍고 싶다.

WH 눈으로 보는 풍경과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풍경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른가?
이병진: 일단 카메라를 들이대면 작가의 의대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모두 같은 사진기로 같은 풍경을 찍는 게 사진이라면 나는 절대로 사진 작업을 하지 않았을 거다. 버튼 몇 개와 조리개 열림과 닫힘, 프레임의 마술이 조화를 부리는 것에 나는 늘 감탄한다. 같은 풍경 앞에서 모두 다른 사진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같은 풍경 앞에서 모두들 최대한의 진지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WH 사진작가이기를 선언한 순간 많이 걷고 많이 기다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길이 있다면?
이병진: 누구나 마찬가지다. 좋아서 가는 길은 언제나 힘이 드는 줄 모른다. 카메라와 필름, 이 두 가지는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피사체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그건 내가 찾아야 할 것들이다. 특별히 어떤 길을 꼬집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 이른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굳이 말하자면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다니는 길은 어디든 좋다. 내 사진을 가장 좋아해주고 아껴주는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니까. 또 카메라를 들고 집밖을 나서는 순간이 가장 좋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맘에 드는 사진이 나왔다면 돌아오는 길이 가장 행복하다. 사진관에서 인화를 하거나 현상을 하고 돌아오는 길도 내게 행복을 안겨준다.

사진=개그맨 겸 사진작가 이병진

객원기자 최경애 doongje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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