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vs 반민주’ 구도에 보수 설 땅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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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레인보 보수’라고 불릴 만큼 정치권에서 보수의 진화 현상이 급작스레 나타난 이유는 뭘까.

정치학자들과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사와 맞물린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한국 전쟁을 거친 뒤 권위주의 정부의 탄생으로 한국 정치는 오랜 기간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 구도를 겪었다. 민주화의 흐름은 보수의 진화를 상대적으로 둔화시켰다. 그 뒤 10년 진보 정권을 거치고 18대 국회 들어 다양한 보수가 출현한 건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정치컨설팅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우리는 70∼80년대 이념적 분화가 지체됐으나 최근 들어 여러 세대가 한꺼번에 출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18대 국회에 대거 진출한 보수 신인들의 대부분이 40, 50대 연령대에 집중된 것도 그런 이유다.

반면 서구 사회는 진작부터 보수의 진화가 이뤄져 왔다. 연세대 김성호(정치외교학) 교수는 “서구 사회 보수주의는 200여 년 전 ‘인간사회를 유지해온 적절한 권위와 전통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프랑스 혁명을 반대한 에드먼드 버크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즉 민주주의가 자리 잡아가면서 자유·책임·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어 두 차례의 세계전쟁과 대공황을 거치며 진보적 가치가 주목받다가 경기 침체와 사회 혼란이 누적되면서 1980년대 들어 보수가 다시 주도권을 찾아왔다.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그 중심에 서 있다. 정치학자들은 이때부터 안보보수·경제보수·가치보수로 상징되는 현대적 의미의 보수주의가 시작된 것으로 분석한다. 동시에 국가 간 무역 장벽이 낮아지면서 무역 규모가 급팽창하는 등 세계화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신자유주의 논란으로 이어졌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의 보수주의는 보다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네오콘으로 상징되는 안보보수 세력은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로 대표되는 가치보수 세력도 목소리를 높여가며 선거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그렇지만 이들 보수세력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김성호 교수는 “네오콘으로 대표되는 안보보수, 기독교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가치보수, 노 택스(No Tax) 보수라 불리는 경제보수 세력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는다”며 “국내외 정치 현안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를 낸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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