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유권자에게 진 마지막 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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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제14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이자 예산국회가 시작됐다.내년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준비에 여념이 없는 의원들이 젯밥에만 마음을 두고 예산국회를 소홀히 하기 쉽다.
정치는 가치와 자원을 권위적으로 나눠 주는 일을 한다.가치도그렇지만 자원도 잘 나눠 줘야 정치를 잘하는 것이다.나라안에 있는 여러 자원을 발굴하고 배분하는 정책을 정부가 내놓으면 이를 견제와 균형의 묘로 잘 다듬어 국민에게 이익 이 돌아가게 해주는 것이 정치의 몫이다.
여러 자원 중 매년 나라살림의 규모며 내용을 정하는 예산 심의가 핵심을 이룬다.
예산이 있어야 사람을 뽑고 기술을 개발하고 정보의 부가가치를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예부터 예산정치라는 말을 써 정치의 요체를 예산으로 인식했다.이는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용적인 사고 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예산을 제대로 다뤄 본 적이 없다.예산국회가 열리면 여야는 싸움부터 했다.국정감사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책의 방향을 잡으려고 애써도 정작 예산문제에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늘 볼모로 잡힌 예산은 회기 말까지 질질 끌려 가다가 전격적으로 처리된다.
국회가 정부예산안을 수정한 비율은 총액대비 평균 1% 내외에불과하다.그러고도 의회정치가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지켜져 나라가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라가 잘 되는 길은 행정부의 예산독재를 국회가 막는 일이다. 역대정부는 낭비많고 경직돼 있는 예산구조를 바꾸려고 많은 애를 썼다.낭비에는 정책실패와 판단착오로 생기는 낭비,연말에 남은 예산을 써버려야 하는 낭비,항과 목에 얽매여 필요없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는 낭비 등 공금 헤프기가 이만 저 만이 아니다. 예산지출이 옳지 않은 예는 해외사업에도 나타난다.세금을 낸 국민은 그 많은 국내경제연구소 이외에 해외에 있는 경제연구소를 정부가 지원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부실한 국회의 예산심의 내지는 통제기능이 낳은 결과다.
예산삭감만 해도 그렇다.총량 면에서 한계가 있다면 깎고 늘리는 결정의 실질적 내용이라도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재선을 위한 지역구사업에 발목이 잡혀 관정(官政)이 유착해서다. 이런 예산의 모순은 유착에서 오는 낭비 말고도 또 있다.그것은 민주정치자체를 옥죄는 것으로 예산이 매우 규제적이고 구속적이기까지 하다.예산의 경직성 때문에 각 기관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잘 못한다.예산의 규제적 성격의 작은 예로 정 부간행물의 원고료를 5천원수준에 묶어놓았으니 좋은 글이 나올 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나쁜 글을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인쇄해 배포한다.조달청 기준의 인쇄비는 여느 민간업자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기 때문이다.
경영실적이 좋은 정부투자기관이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보너스를 올리려고 해도 불가능하다.이미 민영화돼 경영의 합리화를 기할 법한 철도 등 정부기관과 공사들을 끌어안고 있는 것도통제와 조정의 사슬을 풀기 싫어서다.그렇게 구속 적일 수가 없다. 지방시대의 도래에 걸맞게 중앙에서 움켜쥔 각종 잉여금.보조금.교부금,그리고 서로 겹치며 과잉운영되는 기금과 특별회계의관계도 재조정돼야 하며,허울만 민간이지 실제는 官의 것인 관리기금들도 한시바삐 국회의 심의대상이 돼야 한다.
이 나라는 아직도「거울 속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생후 몇개월 되지 않은 아이는 거울에 비친 허상에 불과한 제모습을 보면서 뛸 듯이 기뻐한다.침팬지는 그것이 허상인 줄 알고 거울을 더 보지 않는다.인간은 거울단계를 벗 어나 사회적 경쟁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빨리 들어가야 제 구실을 한다.
나르시즘에 빠져 일류국이 되리라 착각하고 있는 정부나 제 할 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국회가 아직도 「거울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이를 극복하 기 위해 우선 국회가 공전하지 말고 예산심의에 바짝 달라붙어야 한다.그래야 제14대 국회가 납세자인 유권자에게 진 마지막 빚을 갚게 된다.
〈서울大교수.현美노스웨스턴大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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