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상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오전 11시다.3시반까지면 한숨 잘 시간은 충분하다.이제부턴 무조건 잠을 자야 한다.잠을 안자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다.피곤한 상태에서 창조성은 병적인 자발성으로 변해버리니까….창조성은 인간의 가장 생기 있는 힘만을먹고 자란다.
상운은 건강하게 창조적일 때는 항상 성공했으나 피곤했을 때는창조성이 잘못 발휘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아내의 살해도 아마 거기서 비롯된 것일게다.아내는 충분히 직접 내 손으로 죽이지 않고서도 해결될 수 있는 여자 였는데….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내 공간을 파고드는 여자도 없었으니까.
그 분노는 나의 분노가 아니라 악마의 분노다.아내는 함부로 날뛰다 천벌을 받은 것이다.상운은 베개안에 무겁게 고개를 묻고다시 잠을 청했다.민우란 놈을 시험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순발력과 창조성이 필요하다.
그놈의 반응에 가장 적합한 답을….그래서 시험으로 끌어들이는답을 창조적으로 찾아 적용해야 한다.서둘러 잠을 청하는 상운의감은 눈으로 과거의 영상들이 노란 배경 위에서 무채색으로 아른거렸다. 소파를 찢고 그 칼로 아내의 목을 베고 목을 조르며 분노에 떨던 상운,울부짖으며 아내의 시신에 매달리던 아이,채영과의 애틋한 사랑의 순간들,사기를 당하고 자살한 깜둥이 동료들이 단체로 몰려와 행패를 부리던 일등….
못난 니그로들! 그저 깜둥이라고만 하면 길길이 날뛰니….
미국에서는 그 재미에 한동안 그들을 갖고 놀았으나 남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해 망하게 하는 것도 한 40~50번하니 금방 시들해졌다.반응이 다 뻔했기 때문이다.혼자서는 노예같이 전전긍긍하다가 집단으로 모였다 하면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길길이 날뛴다. 그러나 상운의 영상은 결국 애틋하고 감미로운 장면으로 고정됐다.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채영을 처음 호델 방으로 데리고 가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 정복해 들어가던 순간으로…. 역시 스트레스 푸는 데는 성적 공상이 최고다.
그때 채영과 상운은 사랑의 시초단계였다.미국에 갓 온 순진한채영이기에 상운은 그녀에게 조심조심 접근했다.
어느날 파티에서 춤을 청하자 채영은 못춘다면서 거절했었다.그후 둘이 가까워지고 상운이 그 때를 회상하자 채영은 남들 앞에서 쑥스러워 그랬다고 미안해했다.상운은 그것을 빌미로 단둘이 춤추고 싶다며 채영을 호텔로 데려갔다.호텔 방에서 밖을 내다보며 뒤에서 안자 그녀는 고분고분 상운의 품에 기댔다.상운은 그녀를 안고 춤추면서 겉으로 더듬다가 그녀의 옷이 구겨질 것같으니 겉옷만 벗으라고 했다.
채영은 순순히 겉옷을 벗었으나 집요하게 속옷마저 벗기려 하는상운에게 몸을 웅크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건 구겨져도 되는 옷이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