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가사의 감동 더해준 '자막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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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17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 내한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다섯명의 독창자와 합창,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을 위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전곡이 연주됐다. 국내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는 대작이기도 했지만 세종문화회관 개.보수 공사 후 관객 개인용 액정 자막(字幕)이 사실상 처음 선보이는 무대여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마치 오페라 극장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독일어 가사를 한글로 '동시 통역'해주는 자막 덕분에 곡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합창단이 "오 피와 상처, 고통과 조롱으로 얼룩진, 가시 면류관을 쓰신 머리…"라고 부르는 대목에선 객석 여기 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무대의 감동을 '리얼 타임'으로 객석에 전달하는 '자막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공연은 세 시간을 넘겨 끝났지만 자막 덕분에 전혀 지루한 줄 몰랐다.

자막이 없었던들 가사 내용을 이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일찌감치 공연장에 도착해 프로그램 해설을 대충 읽은 관객이라도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오페라 공연 때문에 탄생한 자막이지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경우 공연 시작 전에는 어두컴컴한 객석 의자 뒷면에 크고 환한 글씨로 좌석 번호를 안내해준다. 지난 10일 막을 내린 유니버설 발레단의 '라 바야데르'공연에선 공연 시작 전은 물론 막간(幕間)에 다음 줄거리를 요약해 내보내기도 했다.

'휴대전화를 꺼주세요''사진 촬영은 금합니다'등 자칫 못듣고 넘어가기 쉬운 장내 안내방송도 자막으로 대신할 수 있다. 영화의 예고편처럼 영상과 자막을 곁들여 다음 공연을 안내하는 것도 좋다.

액정 자막의 쓰임새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주최 측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오페라 아리아의 밤은 물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서도 동시 통역을 해준다면 감동은 두 배로 커질 게 분명하다. 가사가 어려워 연주를 꺼렸던 낯선 레퍼토리들도 자막을 준비해 자주 무대에 올리면 어떨까.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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