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르포 ‘명지외고 24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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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시에 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명지외고(교장 유현옥). 정문을 지나 본관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니 흐드러진 벚꽃이 둘러서 있는 너른 운동장이 눈에 들어온다. 벚나무 아래 벤치에 누워 책 읽는 여학생, 땀 흘리며 농구하는 남학생…. 그 곳에선 아이들의 열정과 우정, 꿈들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3학년 이창완(18·사진)군의 하루를 통해 명지외고의 24시간을 들여다본다.


   오전 6시 20분.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린다. 비몽사몽 이불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매일 깨워주는 건 생활관(기숙사) 아침방송이다. 아나운서인 형욱이 녀석, 오늘따라 느끼한 멘트를 하고 있다. 
 오전 7시 45분. 기숙사를 나가야 할 시간이다. 문제집을 들여다보느라 시간이 늦어 아침도 굶었다. 오늘은 전국연합학력평가(모의고사)가 있는 날이다. 벌점을 감수해가며 취침 시간 이후까지 몰래 공부하던 녀석들이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다. 사감선생님께서 각 방을 돌아다니며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녀석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마치 엄마 같다. 
 조회 시간에 겨우 맞춰 자리에 앉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평소 실력대로 시험을 치르라”는 담임선생님 말씀이다. 그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번 더 책을 들여다본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20분까지 하루종일 모의고사를 치러야 한다. 
 오전 11시 45분. 오늘은 시험 덕분에 평소보다 점심을 일찍 먹게 됐다. 식당은 이미 북적북적. 많이 틀렸다고 울상이 된 친구도 있다. 시험이 너무 어렵다. ‘심기일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생각하는데 후배가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English Only Zone(영어사용구역) 운영을 맡은 자치회 아이들이다. 식당에서 설문조사를 하며 교내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오후 4시 20분. 긴 시험이 끝났다. 오후 6시 10분까지 1차 자기주도학습 시간이 이어진다. 오늘은 긴장을 풀기 위해 자유시간이 허락됐다. 매점에서 아이들과 라면파티, 일명 ‘라파’를 벌였다. 한쪽은 생일파티를 하는 아이들로 시끌시끌하다. 우리는 생일인 친구에게 멋진 파티를 선사하기 위해 늘 생각을 짜낸다. 지난번엔 식사 중이던 전교생이 한 친구를 위해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오후 5시엔 대여했던 책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실을 찾았다. 2학년 후배 김신혜가 ‘맨큐의 경제학’을 펼쳐 놓은 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난번에 배운 ‘편익원칙’이 이해가 안돼서 인터넷으로 자료 찾아보는 중”이란다. 나현이도 보인다. ‘To Kill A Mocking Bird(앵무새죽이기)’를 반납하러 온 참이다. 평소 영어 소설을 열심히 빌려 읽더니, 요즘엔 MJPT(또래교수활동)를 통해 1학년 후배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이제 동아리 활동 연습하러 갈 시간. 뮤직홀릭이라는 뮤지컬 동아리다. 전교 회장이다 보니 학생회 일을 하느라 지난번 연습에 빠졌던 터다. 원성이 자자하겠군. 가는 길에 부회장인 김형욱과 마주쳤다. 단기강좌로 태권도를 수강하고 있어 연습하러 가는 중이라고. 농구, 탁구, 플로어볼 등을 하는 아이들로 열기가 가득할 체육관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오후 7시 20분, 다시 교실이다. 2차 자기주도학습이 시작됐다. 오늘은 사회탐구 영역 특강을 듣는다. 학교에서 개설한 40여개 강좌 중 원하는 것을 신청해 들을 수 있다. 같은 반 수원이는 컴퓨터실에서 인터넷 강의로 사탐을 공부한다. 시험이 임박하면 컴퓨터실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오후 9시 30분부터는 3차 자기주도학습. 1·2학년은 도서관, 3학년은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한다. 숨소리도 들릴 만큼 온 학교가 조용하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친구도 보인다. 깨워주자 슬그머니 책을 들고 일어나 교실 뒤로 간다. 졸린 아이들을 위해 높게 만들어진 ‘서서 공부하는 책상’ 앞에 선다.
 자정. 하루 일과가 끝났다. 매점 앞은 벌써 북새통이다. 여자애들은 만날 살찐다고 걱정하면서도 이 시간마다 간식을 먹는다. 생활관으로 들어서니 또 기타소리가 들린다. 매일밤 자기 방에서 ‘내맘대로 콘서트’를 여는 녀석이다. 점호를 기다리며 침대에 누웠다. 이번 주말엔 오랜만에 방단합 모임을 해야겠다.

프리미엄 최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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