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열며>용서의 도구가 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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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광복 5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민족 해방의 명절에 우리 평범한 국민들은 분단 조국의 현실에서 기쁨보다는 이같은 무거운 물음에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진정한 광복이나 해방은 통일이라는데 고개를 저을 사람 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 동안이나 남북으로 갈라져 피흘리며 싸워온 우리민족 사회가 과연 하나로 통일되어 서로 손잡고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는지,사실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을 잘 때까지 남을 용서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우리 종교인들중에 북한의 형제들을정말 따뜻이 맞이해 평화로운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통일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민족적 당위다.그러나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멀리 느껴지고 있을 뿐이다.너무 비관적인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진정한 통일이 무엇을 의미하 는 것인지조차분간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고,우리 각자의 무관심과 무감각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통일문제는 너무도 정치적이고 안보적인 차원에서만 논의돼 왔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인도적인 관심과 노력은 비집고 들어설 틈조차 없었다.그러나 참으로 평화적인 통일을 가능하게 하고 또 통일이후에도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 는 능력은 인도적인 노력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일반 국민들의 관심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 바로인도적인 분야라고 생각한다.
북한에 쌀을 보내는 것도 정치적인 계산이나 판단 이전에 인도적인 관심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모를 일이다.더구나 일반국민들의인도적인 노력이 남북 정권 담당자들 어느 편에서건 비난이나 통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특히 종교인들 은 통일을 위한 인도적 가치의 수호자가 되어 민족의 갈라진 상처를 치유하는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통일 문제를 두고 가장 우려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 사회에서 화해와 용서의 마음이 갈수록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다는사실이다.동부 유럽의 공산권 붕괴로 냉전 체제가 붕괴된 후에도우리 사회에서는 이념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 이 이루어지지 못하고,그러한 논의에 극히 신경질적인 반응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행태는 이념에 대한 확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해타산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같은 체제 안에 살면서도 화해와 용서는 커녕 명백한 자기 잘못도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상황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피를 흘리며 싸웠던 북한 동포들과는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화해할 것인가.
더욱 암울한 일은 통일이 가져다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또는 통일 이후에 상황이 더 악화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지극히 타산적인 생각이 더 깊고 넓게 번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이러한상황들은 우리에게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용기를 복돋아 주기보다 통일에 대한 희망을 빼앗아가는 절망을 안겨준다.
통일이란 무엇인가.그것은 결국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함께살자면 서로 용서해야 한다.우리 종교인들은 물론 언론이 앞장서용서하는 마음을 널리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내 마음을 먼저 바꿔 내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다.통일에 대한 준비는 용서로부터 시작되고,용서는 평화를 가져오는 도구가 될 것이다.용서하자.그래야 우리 민족이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한 광복,참된 해방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천주교주교회의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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