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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동북抗日聯군지휘권 논쟁(中학계견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소련지역으로 이동하자 지휘권 문제를 두고 소련극동군과 항일연군 지도자의대립이 심각하게 나타났다.가장 큰 쟁점은 항일연군의 독자성(獨自性)문제였다.
당시 만주의 항일유격대는 1937년 3만여명이던 대원이 40년에 1천여명으로 급격히 감소할 정도로 생사존망(生死存亡)의 기로에 처해 있었다.중국공산당 북만성(北滿省)위원회는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소련의 협조를 얻어 40년 1월23일부터저우바오중(周保中.제2로군 총지휘)등과 함께 제1차 하바로프스크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서는 중국인 군사지도자와 당정치위원이동북항일연군을 지도한다고 결정했다.3월19일에 열린 소련 극동지방의 당 및 군사지도자들과의 연 석회의에서도『동북항일연군의 영도자는 총지휘와 군정치위원』이라고 결정됐다.이때 소련측 연락원으로 왕신림(王新林)이 선정됐다.
그러나 소련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소련측은 40년말 다시 만주에 있던 당 및 군계통의 주요 지도자들을 다시 소집해 1월의 결정을 뒤집으려고 시도했다.
소련측은 1명의 소련인이 항일연군의 총사령을 맡고,항일연군을소규모의 분산적인 부대로 편성한후 중국공산당 지도기관은 무장부대와 분리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저우바오중은 동북항일연군을 대표해 소련인 총사령의지휘아래 고도의 보안을 유지한 채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고 분산적으로 운영한다면 당조직체계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고 반대했다. 그는 당에서 유격대를 지도하는 것은 원칙이며 소련사람이 총사령을 맡으면 장차 중국공산당 내부의 일을 간섭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며 왕신림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그는 또한 소련측의 주장에 찬성하는 일부 항일연군 지도자들을 개별면담해 그 부당성을 설득했다.
마침내 초기에 소련측 제안을 지지하던 중국공산당 관계자들도 저우바오중의 견해를 지지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측 주장은 왕신림등 몇몇 관계자의 견해였을 뿐 극동군의 정식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보고받은 스탈린도 저우바오중의 견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문제를 일으킨 왕신림은 소환되고 새로운 왕신림이 부임,동북항일연군회의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회의결과를 가지고 소련측과의 연락만을 담당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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