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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와 딩겔이 주는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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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02년 6월 7일 오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워싱턴DC 외곽의 레이건 공항에서 뜻밖의 일을 겪었다. 위스콘신주 전당대회에 가기 위해 밀워키행 비행기를 타려던 그는 “선생님은 특별검색 대상”이란 말을 공항 보안요원에게서 들었다. 요원이 줄 서는 곳을 가리키자 고어는 그리 갔다. 그리고 자신의 짐이 샅샅이 검색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주변의 몇몇 여행객은 검색대를 통과한 뒤 휴대전화 단추를 눌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본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공화당 소속 연방 하원의원 마크 그린의 비서실장 마크 그라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목격담을 얘기하면서 “믿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다.

다음날 오후 고어는 밀워키 미첼 공항에서 같은 일을 당했다. 그때도 그는 보안요원의 지시를 잘 따랐다. 그가 이틀간 두 번이나 특별검색을 받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공항에서 무작위로 선정하는 검색 대상에 뽑혔기 때문에 불편을 겪은 것이다. 뉴스감인 걸 알게 된 언론이 소감을 묻자 그는 “안전을 위한 일에 협조하는 건 당연하다”고 답했다.

같은 해 1월 5일 존 딩겔(현 26선·민주당) 연방 하원의원은 레이건 공항 검색 과정에서 바지까지 벗어야 했다. 그가 금속탐지기 속을 지날 때 경고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그는 “20년 전 낙마 사고를 당해 발목과 무릎, 엉덩이에 금속 핀을 박았다”고 설명했으나 당시 75세의 중진의원을 알아보지 못한 보안요원은 믿지 않았다. 요원은 딩겔을 작은 방으로 데려가 속옷 차림이 되게 했다. 그리고 휴대용 탐지기로 몸 곳곳을 조사했다. 딩겔은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의원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언론이 “심한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대변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공항이 의원의 옷도 벗길 정도로 안전에 신경 쓰는 건 좋은 일이다.”

한국에선 오늘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된다. 그동안 후보들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똑같이 내세운 건 ‘머슴론’이다. 저마다 “국민의 머슴이 될 테니 표를 달라”고 했다. 여당에선 ‘큰 머슴(대통령), 작은 머슴(여당 국회의원)’ 얘기도 나왔다. 후보들이 현란한 말솜씨로 포장한 각종 머슴론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은 얼마나 될까. 국민은 미립이 트였다. 후보들이 의원이 되면 달라진다는 걸 이미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어느 누구의 머슴론도 국민의 마음을 크게 흔들지 못한 건 이 때문이다.

최근 한 현역의원이 선거구의 초등학교 행사에 참가하려다 제지당하자 학교 교감선생님에게 폭언을 했다 한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교감선생님이 교육청에 낸 경위서엔 의원이 “건방지다”고 하는 등 모욕적인 말을 뱉은 것으로 나와 있다고 한다. 현장에 있던 학부모 중엔 의원이 “교감과 교장을 잘라버리겠다”고 말하는 걸 들은 이도 있다 한다. 그 의원이 무슨 말을 했든 그의 태도는 고압적으로 비친 게 틀림없다.

이 일을 전해들은 국민은 후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슴 안 돼도 좋으니 상전 행세나 하지 마라’,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국민은 그동안 의원들의 꼴불견을 여러 차례 목도했다. 길가에서 교통딱지를 뗀 경찰관의 뺨을 때린 의원도 있었고,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지역 유지들에게 폭언 세례와 함께 맥주병을 던진 의원도 있었다. 그걸 아는 국민은 후보들이 의원 배지를 단 뒤 ‘군림하는 상전’으로 변신하지만 않아도 고맙게 생각할지 모른다.

오늘 선거에서 당선되는 이들은 고어와 딩겔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길 바란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국민과 같은 대접을 받는 걸 당연시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을 본받는다면 정치적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일 기자·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