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아름다운 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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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름다운 계단’ - 강성은(1973~ )

다리를 벌리고 앉은 여자 아래
졸고 있는 죽은 고양이 옆에
남자의 펄럭이는 신문 속에
펼쳐진 해변 위에
파란 태양 너머
일요일의 장례식에
진혼곡을 부르는 수녀의 구두 사이로
달려가는 쥐를 탄
우울한 구름의 손목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떨어져 내린
시인의 안경이 바라보는
불타오르는 문장들이 잠든
한 줌 재가 뿌려진
창밖의 검은 밤 속
흘러가는 기차를 탄
사내의 담배 연기를 따라
붉은 달이 떠 있는
검은 딸기밭 아래
곱게 화장한 미친 여자 뱃속에
숨겨진 계단 사이로
길을 잃은 아이가
계단을 펼쳤다 접으며 아코디언을 켜고
계단은 사람들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가고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로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계단은 점점 더 느려져
잠이 든 채 연주되고


계단은 악기, 일요일 날 장례식에 가는 수녀의 구두 소리에도 진혼곡에도 반주를 넣어주고, 뿔테 안경 낀 시인이 바라보는 우울한 석양의 핏방울도 받아주고, 더러 문장처럼 계단엔 검은 딸깃물이 점점이 찍혀 있지. 계단은 아코디언, 곱게 화장한 미친 여자 배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계단을 펼쳤다 접으며 노래를 부른다네. 눈을 감고 한 계단씩 올라가는 사람들 귓전에 슬픈 연주가 울린다네. 위 시에서처럼 우리의 삶에도 계단이 있을 것이다. 한때는 소중했지만 지금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기억들, 시인의 심상이 빚어낸 저 아름다운 계단은 그 사라진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슬프고 아름다운 악기에 비유할 수 있다.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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