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눈>기마전 목자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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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민학교 운동회의 꽃인 기마전(騎馬戰)은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협동과 진취적 운동의 상징이다.
국민학교 교사들은 이런 기마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전한다.학부모들로부터 『우리아이는 몸이 약하니 빼달라』는 부탁이 적지 않아 일부 학교는 기마전을 취소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내 귀한 아들」에게 리더격인 「장수」를 시켜야지 「말」이나 「마부」는 시킬 수 없다는 의도도 배어 있다.
부모들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가슴에 협동심보다 개인주의를 은연중 심어주고 있는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연봉제.명예퇴직제.인사파괴.리스트럭처링.슬림화.거품제거….
』 최근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앞다퉈 도입하고 있는 신인사(新人事)제도와 관련된 내용들이다.이 제도들은 한마디로 임직원의 「목자르기」가 핵심내용이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태평양 저편 나라의 일로만 여겨졌던 것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목자르기식 「인사혁명」이 세계화시대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바로 우리기업들의 절실한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평생직장과 연공서열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우리기업들이 어느새「고령(高齡)=高임금=高비용」의 등식을 확립해가고 있다.
기업이 이 등식에 따라 감원(減員)이라는 비수를 휘두르지 않으면 기업 자체가 동맥경화증에 걸린 공룡처럼 쓰러지고 만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감원의 칼날이 무딘 경영자가 있다면 그자신이 먼저 추방의 대상이 되는 판이다.
평생직장의 밑둥을 흔드는 이같은 인사혁명은 유행처럼 한 때 왔다 사라지는 일과성(一過性)이 아니다.
이제 한국의 샐러리맨들은 정년퇴직을 보장하는 평생직장에 마음편히 다니리라 기대한다면 사치스럽다 못해 헛된 꿈을 꾸는 꼴이되기 십상이다.
특히 지난 고도성장기때 일에 중독되다시피 온힘을 다해 뛰었던40~50대 중.장년층은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그간의 노력에 비해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이제 등 높고 팔걸이 있는 의자에 편히 앉아 희생의 반대급부를 향유할 즈음 경영쇄신의 제물이 된다며 서글퍼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한국도 서양처럼 마치 이사가듯 직장을 옮기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프로야구 선수가 점잖지 못하게(?)몸값을 흥정하듯 연봉에 따라 이적하는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이제 고용은 프로정신에 입각해 결정되는 철저한 계약이지 더이상 온정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
샐러리맨들에게 인사혁명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의식 대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기업의 인사혁명 기준이 팀워크(협동정신)을 간과하고 개인의 업적이나 자질만 강조할 때 엄청난 부작용도 뒤따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자르는 문화」나 새로운 「평가문화」가 아직 정착되지 못한 시점에서 결과적으로 불안감을 동반하는 과도한 자극이 지속될 때조직의 안정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서바이벌 증후군(실직 공포증)에 몸을 떠는 조직원들에게 충성심이 생길 리 없기 때문이다.
조직원들 사이에 「나 외에는 모두 경쟁자요,잠재적 적」이며 「남의 진보는 곧 나의 퇴보」라는 의식이 번지면 시너지 효과는기대하기 어렵다.
왕모래型 조직에선 협동이 필수인 기마전을 펼칠 수 없다.목자르기식 인사혁명은 피할 수 없는 큰 추세지만 목자르기는 기마전이 가능한 범위안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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