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의 뜻, 외국인에게 제대로 전하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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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승배(39·사진) 포항공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과학철학자다. ‘과학적 리얼리즘과 반(反)리얼리즘’으로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철학이 별도 학과로 독립되지 못해 신소재공학과에 적을 두고 과학영어 등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해부터 판소리라는 외도에 푹 빠졌다. 듣거나 따라 부르는 데 빠진 게 아니다. ‘춘향가’를 비롯한 판소리 다섯 마당을 영어로 완역하고 일에 몰두하고 있다.

판소리의 본고장으로 자처하는 전라북도와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에서 의뢰받은 일이다. 춘향과 몽룡이 이별하는 장면을 번역하다 너무 슬퍼 왈칵 눈물까지 쏟았다는 그를 포항에서 만났다.

우선, 왜 판소리인지 궁금했다. 그것도 과학철학 교수가 말이다.

“판소리의 고장이라는 전주가 제 고향입니다. 어려서부터 항상 소리와 친숙했죠. 그래서 판소리 영역 사업을 한다기에 뭔가 기여하고 싶더라고요. 영어가 특기이기도 하거든요. 마침 잘 아는 영문과 교수가 연결을 해줘 작업을 맡는 행운을 누리게 됐죠. 판소리 전문가인 최동현 군산대 교수의 해설을 바탕으로 원문을 이해해가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철학자가 영어가 특기라니.

“어려서부터 그냥 영어가 좋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5년간 철학 토론 수업을 맡기도 했고요. 영어를 익힐 때 듣기 능력을 기르려고 녹음기를 돌리고 또 돌리다 여럿 망가뜨렸죠. 영어는 무엇보다 본인이 흥미를 갖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원어민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지만, 그들이 도깨비 방망이는 아니잖아요.”

판소리 번역에 어떤 원칙이 있는지를 물어봤다.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명료한 표현이 원칙입니다. 판소리의 맛과 멋인 각운이나 리듬감을 완벽히 재현하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

예술인데, 조금 멋을 부린 표현을 쓸 수는 없었을까.

“번역에도 여러 목적이 있죠. 이번 번역은 판소리의 뜻을 가장 충실히, 있는 그대로 외국인들에게 전달하는 게 목적이죠. 이 번역본은 매해 10월 열리는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외국인을 위한 자막으로 쓰이고, 책으로도 나올 겁니다.”

목적은 이룬 듯하다. 번역본을 감수한 원어민 영어강사 재클린 에스타빌로는 “거의 고칠 것이 없을 정도로 깔끔한 번역이었다”라며 “번역본을 읽고 나니 실제로 판소리 완창 공연을 보고 싶어졌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번역할 양은 어느 정도인지.

“작업을 마친 ‘춘향가’의 경우 명창 별로 4개의 바디(버전)가 있어 모두 번역했습니다. 평균 400쪽짜리 책 4권 분량입니다. 앞으로 작업할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 ‘심청가’ 등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사실 번역에 파묻혀 있다 보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그런 건 순간이죠. 제가 하고 있는 이 작업으로 많은 외국인이 판소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보람이겠습니까.”

판소리 번역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그는 그 다음 일도 생각하고 있다.

“앞으론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영어로 옮기고 싶은 생각입니다. 미국에 유학할 때 도서관에 중국과 일본 역사 교과서는 있는데 한국 것은 없더라고요. 판소리 번역본과 함께 영어로 된 한국 역사교과서가 전세계 대학 도서관 서가에 꽂히게 되고, 세계인들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전수진 기자

<‘춘향전’ 번역 사례>

‘촉루낙시(燭淚落時)에 민루락(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 원망 드높더라)’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변사또의 잔치에서 읊는 한시의 일부)

=>When the drops of the candles fall down, so do the tears of the people. Where songs are high, so are the resentments of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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