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열며>"용서해 주십시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5백80년전에 개혁을 부르짖던 한 가톨릭 사제가 콘스탄츠에서화형을 당했다.혼란의 시대였다.가짜 교황을 비롯,세사람의 교황이 있었으나 그중 하나도 참석치 않았던 공의회의 정치적인 틀 속에서 단죄받았던 얀 후스,그의 고향 보헤미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시기스문트 황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20여년동안 무력항쟁이 계속됐다.이른바 후스派 전쟁이다.
인간의 욕심을 종교적인 구호로 색칠한 그 전쟁의 정반대편에서죽어갔던 또 한 사람의 예수회 사제가 있었다.얀 사르칸데르.이름마저 같은 이 두 사람은 똑같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양심인」으로서 모두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 들을 용서했다. 얼마전 5월21일 아침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체코 올로모우츠의 네레딘 공항에서 강론을 했다.『우리의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거기는 사르칸데르의 덕행을 기려 그를 성인으로 모시는 시성식(諡聖式)자리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이 시성식은 과거의 고통스러운상처를 들추어 보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오늘 저는 로마 교회의 교황으로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을 대신해 이 민족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非가톨릭 신자들에게 가한 잘못에 대 해 용서를 청합니다.또한 동시에 저는 가톨릭 신자들이 당했던 모든 해악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용서를 약속해 드립니다.바로 오늘이 새로운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 역사의 변천 속에서 가톨릭 교회도 많은 잘못을 저질러온 것이 사실이다.그 잘못들을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몇년 전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단죄가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를 복권시켰다.매우 늦었을 따름이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신앙이라는 허울아래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을 죽기보다도 힘들어 하는형편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극단으로만 치닫던 이념의 갈등을 몸서리치게 겪어왔다.공산권의 붕괴로 세계가 이념 전쟁의 시대를 마감했다고 하지만 분단 50년을 살아온 우리는 아직도 이념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또 우리는 뒤틀린 지역감정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다들 남의 얘기로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운위하지만 그 어느 한 사람도내가 지역차별을 했다고,그것은 몹시 잘못된 일이었다고 용서를 청하는 자가 없다.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해자는 잘못을 뉘우치지도,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왜 피해자의 용서와 화해만을 기대하는가.그것이 개인인 경우에는 좀 덜하지만 집단으로 옮겨가면 도무지 잘못 그 자체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우리가 그렇게도 개탄하는 이념 갈등이 나 지역 감정보다도 더 무섭고 고착된 것이 종교간의 몰이해와 증오심일 것같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 무수한 교파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언제까지 지속돼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우리는 서로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며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진정한 대화로써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아까 그 발언을 한 직후인 5월25일그리스도교 일치에 관해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문서를 발표하고,교황의 개방적인 수위권(首位權)행사 방법을 다른 교파 지도자들과 함께 연구해 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교황청은 또한 이슬람교의 단식 해제일과 불교의 부처님 오신날에 즈음해 모슬렘과 불자(佛者)들에게 각각 경축 메시지를 보내고,미래 세대를 위해 참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함께협력하자고 했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 다가오려면 종교인들부터 서로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주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천주교중앙협사무총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