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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34<김일성명령서>金日成.朴憲永입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6월29일 박헌영(朴憲永)은 『남반부 전체의 완전 해방은 오직 시간문제』라고 선언하고 『』남반부 인민들이 인민군과 자기들의 최후 승리를 위하여 이번 전쟁에 통일적.애국적 역량으로 적극 참가』하도록 호소 하는 방송연설을 했다(북한 내무성 문화국기관지 『보위』1950년 6월29일자). 이 연설에는 북한군의 서울 점령에 고무된 박헌영의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당시 박헌영은 전쟁시기「통일적인 령도기구」로서 조직된 7인군사위원회의 일원이었다.
해방직후 남한 공산주의자를 대표하는 박헌영이 한국전쟁에 대해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점은 오랜 논쟁점 중의 하나였다.
박헌영이 개전(開戰)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헌영이 조선노동당의 고위층과 소련당국에 북한이 남침을 시작하면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할 것임을 납득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박갑동(朴甲東.前남로당원)은『박헌영이 무력 통일을 반대하고 평화통일 노선을 고수했다』고 증언했다.이 논쟁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방후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이 협력과 경쟁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두사람이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全한반도의 공산화」에는 동일한 입장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45년10월8일 개성근처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장에서였다.이후 두 사람은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협 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박헌영이 46년10월「10월폭동」의 와중에서 월북함으로써 두 사람의 역학관계는 결정적으로 변화됐다.김일성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북쪽에서 박헌영은 「식객(食客)」의 처지는 아니더라도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中央日報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한 『스티코프비망록』에 나와 있듯이 월북후 박헌영은 남로당과 북로당의 중앙위원회를 연합함으로써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고자 했다.
48년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박헌영은 부수상겸 외무상으로 제2인자 위치를 차지했다.그러나 그가 북한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는아니었다.그는 공식행사나 소련.중국방문때 남쪽을 대표하는 인물로 대접받았으나 黨과 軍의 실권은 김일성 직계와 연안파.소련파들이 장악했다.따라서 북한정권에서 박헌영의 위상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박헌영은 북쪽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에서 뚜렷한 「투쟁성과」를 올려야 했다.48년 남한정부 수립후 남로당이 폭력투쟁과 「유격투쟁」을 강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실제로 그는49년 「8.15해방 제4주년에 즈음한 보고서」 에서 『조선의통일이 지연되면 될수록 남조선의 인명은 더욱 더 잃어질 것이므로 통일은 당과 인민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즉각적인 과제』라고강조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전쟁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은 분명하다.그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남쪽을 회복함으로써만이 노동당내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고,김일성과도 동등 내지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
〈鄭昌鉉 현대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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