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오럴 해저드에 스트레스 받는 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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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주말 이명박 대통령은 “물가 안정이 성장보다 시급하다”고 했다. 사흘 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환율이 1030원까지 간 것은 천장을 테스트해 본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저녁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과 미국의 정책금리 차이가 2.75%포인트까지 벌어졌다”고 맞받았다. 외환·금융시장은 당연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통령·장관·총재의 발언이 튀어나올 때마다 환율은 20원씩 출렁거렸다. 시장을 안정시켜야 할 정책 당국자들이 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양상이다.

물론 사안에 따라 정부 부처들이 다른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물가 안정에 목을 매는 한은이나 경제성장에 애타는 재정부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환율·금리·주가는 매우 민감한 경제변수다. 당국자들이 구체적인 수치는 언급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방향성마저 모호하게 남겨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도 당국자들의 엇박자 발언이 정책 혼선을 자초하고 있다. 재정부와 한은이 지난주 고위정책조정회의를 통해 필요할 경우 외환시장에 개입하되 구체적인 언급은 자제하기로 한 합의가 무색해졌다.

인수위부터 시작된 정책 혼선은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좀체 고쳐지지 않고 있다. 적대적 합병을 방어하는 포이즌 필(독약 조항) 도입을 놓고 법무부와 금융위원회가 맞서고 있다. 민영의료보험 활성화에는 재정부와 보건복지가족부의 생각이 다르다. 이런 주요 정책일수록 관련 부서 간에 정책 조율을 충분히 한 뒤 공개해도 늦지 않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정부’와 ‘친시장주의’를 내걸고 출범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시장의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하다. 일단 발표한 정책은 일관성 있게 추진하고 환율이나 금리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 쓸데없는 정책 혼선은 시장 참여자들의 스트레스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런데도 불과 한 달 사이에 새 정부가 자꾸 말만 앞세우면서 오럴(말) 해저드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정책 혼선이 반복되면 ‘아마추어 정부’라 비판받은 노무현 정권과 별반 다를 것도 없게 된다.